#70번째 책) 심보선, 『눈앞에 없는 사람』, 문학과지성사(2011)
ㅡ 첫 시집에서 슬픔을 노래하던 그가 이제 사랑을 말한다. 그의 첫 시집을 읽은 뒤로 우리는 그의 제목을 반대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가 오히려 슬픔의 시간으로 가득 찬 시집이었듯이, 그가 눈앞에 가득한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해 되려 『눈앞에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은 이제 자연스러워 보인다. 지독한 슬픔을 경유한 후에야 그가 "슬픔이 없는 십오 초"를 누릴 수 있던 것처럼, 지독한 사랑만이 그를 "눈앞에 없는 사람"에게로 데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첫 번째 시집은 심보선의 '슬픔론'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심보선의 '사랑론'을 읽는다.
ㅡ "사랑하는 두 사람/둘 사이에는 언제나 조용한 제삼자가 있다 (…) 사랑에는 반드시 둘만의 천사가 있어야 하니까"(「매혹」 중) 제삼자라니?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는데 타자가 끼어들 공간이 어디 있나 싶지만, 이 제삼자의 정체를 다른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바로 '언어'다.
단어들이여,
선량한 전령사여,
너는 내 사랑에게 "저이는 그대를 사랑한다오" 전해주었고
너는 나에게 "그녀도 자네를 사랑한다네" 귀띔해 주었지.
그리고 너는 깔깔거리며
구름 위인지 발바닥 아래인지로 사라졌지.
-「나의 친애하는 단어들에게」 부분
ㅡ 언어(단어)는 저처럼 "선량한 전령사"가 되어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를 오간다. 상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주고 상대로부터 나도 사랑한다는 말을 받아온다. 얼마나 아름다운 상상력인가. 이 제삼자는 그의 말대로 "둘만의 천사"가 되어 연인을 연인답게, 사랑을 사랑답게 만들 것이다. 큐피드는 실재한다. 벌거벗은 채 활을 쏘는 날개 달린 아기 천사가 아니라, 우리가 내뱉는 말(言)이 그것이다.
ㅡ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의 말을 전하지만, 그 반대의 진술도 가능한 것 아닐까. 사랑해서 사랑의 말이 오가는 게 아니라, 사랑의 말이 오가기 때문에 사랑이 가능해진다고 말이다. 이는 말 없이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이라는 제삼의 전령사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둘 사이에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그러니까 '사랑의 말'이 존재하기 이전에 '사랑' 자체가 우선 '말' 위에서만 성립된다는 얘기가 된다. 즉 우리의 사랑은 말로써 존재하고 말에 의해 실현되는, '말의 사랑'일 수밖에 없다.
ㅡ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다. 말은 자주 부정확하고 불완전하다는 것. “이제부터 우리는 쓴다/지나치게 많은 말들을 (…) 선물을 준비하듯 탄약을 장전하듯/옳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고/아름답기도 하고 처절하기도 한/단어와 문장 들을” (「찬란하지 않은 돌」 중) 말은 늘 너무 많거나 너무 적고, 지나치게 날카롭거나 볼품없이 무디다. 시인의 말대로 선물이 되기도, 탄약이 되기도 하는 우리의 언어는 사랑 자체를 부정확하고 불완전한 것으로 만든다. 완벽한 말, 정확하고 완전한 말. 모든 연인들은 그런 말을 찾아야 한다.
어떤 연인도 왕도 신도
내게 주지 못한
어떤 절대
그대의 손가락이
그들 대신 그것을 가리켜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쓸 수밖에 없다
발치에 구르는
찬란하지 않은 돌 하나를
눈앞에 치켜들고
그것이 스스로 파르르 떨릴 때까지
-「찬란하지 않은 돌」 부분
ㅡ 완벽한 말, 정확하고 완전한 말. 모든 연인들이 찾아야 할 그런 말은 “어떤 절대”에 속한다. 그 ‘절대’의 영역에 우리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언어는 “발치에 구르는 찬란하지 않은 돌”일뿐이다. 완벽한 사랑을 꿈꾸는 우리가 보잘것없는 언어로 무얼 할 수 있나. 시인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그것이 “스스로 파르르 떨릴 때까지” 노려보기나 할 뿐이 아닌가. 이 때문에 사랑은 슬픔과 만난다. 우리의 사랑이 ‘말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 말이 유한하고 볼품없기 때문에, 사랑은 늘 기쁘기만 한 것이 못 되는 것이다.
ㅡ 허나 그렇다고 해도, 우리의 사랑은 계속될 것이고 언제까지나 우리는 사랑하는 존재일 것이다. 사랑은 어떤 불가능에 부딪혀 한계를 깨닫고 그만두게 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그 상태로서 계속되는 것 아닌가. 찬란하지 않은 돌이 스스로 빛날 때까지, 그 불가능한 연금술을 계속해서 시도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가 눈앞에 없는 연인의 오지 않는 소식을 영원히 기다리는 것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아주 오래 기다리고 있었다” (「4월」 중)
ㅡ 우리는 언제 완벽하게 사랑하게 될까. 완벽하게 말할 수 있을 때 그렇게 될 것이다. 완벽한 말, 정확하고 완전한 말. 모든 연인들은 그런 말을 찾아야 한다. 그러니 우리에게 시인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그들이 우리를 대신해 다음과 같이 다짐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평생 모은 그림자 조각들을 반죽해서
커다란 단어 하나를 만들리.
기쁨과 슬픔 사이의 빈 공간에
딱 들어맞는 단어 하나를.
-「나의 친애하는 단어들에게」 부분
ㅡ 이제 나는 시인으로서 그가 하는 작업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신뢰하게 됐다. 그러나 그가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믿음이 아니다. 완벽한 말(단어)을 찾겠다는 저 다짐이 실현되는 날, 그는 더 이상 시를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의 믿음은 차라리 그가 영원히 실패할 거라는 믿음이고 그 실패가 분명히 아름다울 거라는 믿음이다. 그가 하는 말을 사랑한다. 그 말은 사랑의 말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하는 사랑을 경청한다. 그 사랑은 말의 사랑이기 때문에.
08.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