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번째 책)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2021)
ㅡ 그를 잘 알지 못하지만, 작가 한강이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해 주는 최선의 말은 아마 이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는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고기를 보는 일도 힘겨울 때가 있어요.” 소설 『소년이 온다』를 발표한 후 어느 인터뷰에서 그녀가 한 말이다. 저 말이 단지 그녀가 채식주의자라는 사실만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극도로 민감한 감수성과 폭력에 대한 극한의 예민함이 작동하고 있어서, 나는 사람이 과연 저렇게까지 예민하고 섬세해질 수도 있구나를 생각하며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엄격히 따지자면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고기가 구워지는 모습에서조차 괴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런 소설을 쓸 수 있었겠나. 『작별하지 않는다』도 마찬가지다. 제주도에서 벌어진 그 비극을 직접 겪은 게 아니라 해도, 그는 마치 제 일처럼 힘겨워하고 있다.
ㅡ 우리의 주인공 ‘경하’는 친구 ‘인선’의 새를 구하러 제주도로 떠난다. 인선의 제주도 집에 홀로 남겨진 새 ‘아마’는 누군가 물을 주지 않으면 곧 죽을 것이다. 경하는 극심한 눈 폭풍을 뚫고 아마에게 가는 와중에 여러 번 죽을 위기에 처한다. 정말 그 새가 목숨을 걸면서까지 지켜야 할 존재인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면서. “이해할 수 없다. 아마는 나의 새가 아니다. 이런 고통을 느낄 만큼 사랑한 적도 없다.”(152면) 그러나 우리는 경하에게 왜 아마를 구하러 가느냐고 묻지 않아도 이미 안다. 경하를 대신해 한강이 직접 대답한 바 있기 때문이다. “저는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고기를 보는 일도 힘겨울 때가 있어요.” 그렇다면 며칠째 물을 마시지 못해 조금씩 죽어가는 새를 상상하는 일이란, 그에게 또한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까.
ㅡ 세상의 고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을 것이다. 나의 고통과 너의 고통. 이러한 이분법은 손쉽고 명확하다. 어떤 고통 앞에서 그것이 내 것이냐 타인의 것이냐를 따질 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냉철한 판사가 된다. 만일 내 것이라면 그 고통은 과장되기 쉽겠고, 남의 것이라면 축소되거나 많은 경우 무시될 것이다. 요컨대 나의 고통은 타인의 고통을 간단히 압도한다. “바람이 몰아쳐 들어온다. 두통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내 마음은 차츰 마비되어, (…) 불안도, 구해야 할 새에 대한 생각도, 인선에 대한 마음까지도 통증이 예리하게 그어놓은 금 바깥으로 빠져나간다.”(122면) 새의 고통과 인선의 고통은 내가 직접 겪고 있는 맹렬한 추위와 두통 앞에 무력하다. 경하가 병원 로비에서 손/발가락이 절단된 사진을 바라보는 장면도 그렇다. 그 끔찍한 광경에서 “눈을 피하고 싶”(32면)었다거나 “정확히 보지 않는 편이 좋”(256면)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그가 타인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을 넘어설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것만 해도, 고통은 언제나 충분하다. 타인의 고통까지 받아들일 공간이 우리 안에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ㅡ 한강의 소설은,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거나 혹은 반문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스스로의 고통만큼이나 타인의 고통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줄 아는 인물들이 여기 있다. 눈 폭풍 속으로 새를 구하러 가는 경하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학살 증언 자료집과 관련 기록물을 수년간 모았던 인선의 어머니도, 그 기록물 속에 파묻혀 하루를 보내던 인선도, 그리고 학살당한 이들을 생각하며 가끔 멍하게 환상에 빠져 지냈던 그녀의 아버지도, 다들 절망적이고 뭔가에 실패한 삶을 살아간 것처럼 보이지만 적어도 그들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만드는 데에는 성공한 이들이다. 마치 그들이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의 고통은 내게도 고통스러워요. 그러니까 ‘제주 4 3’과 ‘보도 연맹 학살’ 사건은 그들의 고통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이 되어야 한다고, 저 인물들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ㅡ “모든 인간이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또한 대륙의 한 부분이라/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간다면/유럽 땅은 또 그만큼 작아질 것이며” 영국 성공회 신부 존 던이 썼다고 알려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한 대목이다. 사람이 죽으면 종을 울리던 관습에서 저 제목이 탄생했다. 이 시에서 존 던은 누가 죽었기에 종을 울리는가 궁금해하지 말라고 전한다. “어느 누구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나를 감소시키나니”라는 대목이 설명하듯, 누군가의 죽음은 곧 내 일부의 죽음이므로, 종은 바로 우리를 위해 울린다는 것. 이 유명한 시와 한강의 소설은 썩 닮아 있다. 나의 고통과 너의 고통이라는 순진한 분류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결국 살리지 못한 새를 보며 “새는 새였고, 나는 인간이었을 뿐일까?”(196면)라고 비정하게 묻는 일은 너와 나의 고통이 철저히 각자의 것에 불과하냐는 물음과 같다. 과연 그런가. 70년 전 그 섬에서,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겪었던 고통은 나의 것이 아닌가. 정말 그렇게 말해도 괜찮은 걸까.
ㅡ 작중 경하와 인선이 하려는 작업(아흔아홉 그루의 나무를 들에 심어 먹을 입히고 그 위에 눈이 쌓이는 모습을 영상으로 담는 일)이 대답을 대신한다. 그들은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상업적 목적이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아니다. 그들은 고통받으려고 그 작업을 한다. 둘은 나무를 한 그루씩 심어 나갈 때마다, 거기에 먹을 칠해 나갈 때마다, 그리고 그 위에 눈이 한 송이씩 쌓일 때마다 고통받을 것이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억울하게 고문당했고 아무 이유 없이 총살당했는데, 도저히 그것과 무관한 삶을 살 수는 없다는 듯이, 마치 고통받는 것이 그들의 마땅한 의무인 듯이. 작품 2부에는 인물들의 입을 빌려 어떤 산속 바위에 대한 전설이 언급된다. 착한 일을 해서 혼자만 살아남게 된 여자가 있고 나머지 마을 사람들은 해일에 휩쓸려 죽는데, 이때 그녀에게는 산중턱에서 뒤를 돌아보지 않아야만 살 수 있다는 조건이 붙는다. 하지만 여자는 어김없이 뒤를 돌아봤고, 결국 그 자세 그대로 돌이 되어 버렸다는, 그런 전설.
ㅡ 이 전설은 타인의 고통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한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자유의 몸이 되어 살아가거나 뒤돌아본 채로 돌이 되거나. 그러고 보면 폭설이 내리는 밤의 숲속에서 눈 속에 둘이 함께 눕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이 소설의 결말은 뒤돌아본 대가로 돌이 되고 만 저 전설 속의 여자와 흡사하지 않은가. 경하와 인선은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작중 경하가 말한다. “돌이 됐다고 했지, 죽었다는 건 아니잖아요?”(241면)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 그런 상황이 오면 언제나 뒤를 돌아보겠다는 것이지, 돌이 되어 죽고 싶다는 게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모른 척하고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지 자신의 삶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그 아픔들을 영원히 안고 살아가겠다는 것이지 그 아픔 때문에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게 아닌 것이다.
ㅡ 신형철 평론가가 시인들의 책무란, “가장 먼저 울지는 못하더라도 가장 마지막까지 우는 일” (「천안함, J 선생님께」)이라 쓴 문장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가장 마지막까지 우는 자란 비극을 잊지 않거나 잊지 못하는 자다. 나의 고통 앞에 너의 고통이 잊혀지는 게 아니라, 너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만들어서 절대로 잊을 수 없게 하는 것. 그렇다면 뛰어난 작가란 오래 슬퍼하고 영원히 아파하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들이 약해서 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오랫동안 울 힘을 가진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무력하게 고통받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차라리 사력을 다해 고통받는다고 말해야 한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이 그렇고, 작가 한강이 그렇다. 그들은 얼마든지 더 울고 더 고통스러워할 준비가 되어 있다. 뒤돌아보다 돌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 아픔들과 작별하지 않는다.
ㅡ 작별하지 않겠다는 것은 망각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망각하지 않겠다는 것은 끊임없이 고통받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 영원히 고통받으며 서 있겠다는 것은 처연한 체념이 아니라 결연한 의지다. 절단된 손가락의 봉합 수술을 받은 인선은 삼 분에 한 번씩 봉합된 자리에 바늘을 찔러 넣어야 한다. “중요한 건 피가 멈추지 않게 하는 거야. (…) 계속 피가 흐르고 통증을 느껴야 한대. 안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했어.”(40면) 삼 분마다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는 인선의 처지가 왜 안쓰럽기보다는 감동적일까. 아마도 작가 한강의 모습이기도 할 그의 모습에서,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고통의 의무를 짊어진 자의 결연함을 본다. 무려 칠십 년이나 지난 일인가. 아니, 칠십 년 밖에 지나지 않은 일이다. 계속해서 통증을 느끼지 않으면 신경이 죽어 버린다는 저 말처럼, 우리가 제주도의 비극을 기억하며 계속 고통받지 않는다면 역사의 한 부분이 죽을 것이다.
10.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