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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Nov 18. 2022

어떤 영원한 비유들

#83번째 책)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사(2008)


나는 썩은 과일 도둑,
밀가루 포대 속에 집어넣은 젖은 손

-45면, 「나는」 부분



ㅡ 오늘은 비유(比喩)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모두가 알듯 비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마술이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한용운, 「알 수 없어요」, 『님의 침묵』) 만해 한용운이 우리 문학사에 선사한 이 아름다운 문장을 빌려 말하자면, 비유(은유)는 나의 "가슴"(원관념)이 약한 "등불"(보조관념)로 치환되는 마술이다. 왜 마술이냐고? 마음, 감정, 정신과 같은 관념적인 존재들의 모호함과 추상성으로 인해 우리가 그 진실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호소할 때, 은유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자명한 실체를 가진 대상의 이름을 빌려 그곳으로 통하는 작은 샛길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타는 나의 가슴"은 대체 어떤 상태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이라는 멋진 은유를 통과하고 나면, 화자의 내면 속 진실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 가능해진다. 표현할 수 없는 곳에 도달하는 표현, 비유란 그런 것이다.

ㅡ 당연히 비유의 기본 원리는 서로 다른 두 대상의 '유사성'을 매개로, 그 둘을 붙여 놓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만해의 구절,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한용운, 「님의 침묵」, 『님의 침묵』)에서 이와 같은 비유(직유)가 가능하게 하는 '유사성'은 무엇인가. "황금의 꽃"도 "옛 맹서"도, 모두 절대 깨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고 찬란하게 빛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니 이러한 유사성으로 둘은 묶일 수 있었다. 이처럼 시인들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사물들의 유사성을 발견하려 애쓴다. 그 유사성이 참신하고 창의적일수록, 더 재밌는 비유가 탄생한다. 가령 이런 구절은 어떤가. "매미의 울음이 강박관념처럼 나무 위에 들러붙어 있다"(이경임, 「잠깐씩」, 『겨울 숲으로 몇 발자국 더』).

ㅡ 나는 이 구절을 외우고 있다. 언젠가 저 구절을 읽은 뒤로 쉽사리 잊을 수가 없다. '껌딱지처럼'도 아니고 '거머리처럼'도 아닌, "강박관념처럼"이라니. 당연히 이것은 쉽게 떨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다는 특성에 기반한 표현이지만, 이 시인이 그러한 "매미"와의 유사성을 "강박관념"에서 발견했다는 사실이 나는 놀랍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시인이 비유를 통해 붙여놓으려는 두 대상 사이의 간격이 멀면 멀수록 비유의 효과가 극대화된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쉽게 연상 가능한 유사성이 아니라,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창의적인 유사성의 포착. 앞으로도 이 구절은 나에게 '좋은 비유'의 한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더 좋은 비유'가 있다.

ㅡ 때로는 유사성에 근거해 두 대상이 연결되는 자연스러운 순서를 따르지 않고, 두 대상을 시인이 (억지로) 붙여놓고 보니 뒤늦게 그 사이에서 유사성이 발견되는 역설적인 경우도 발생한다. 진은영의 최근 시집에서 한 구절 뽑아 옮긴다. "나는 사랑의 민달팽이들을 풀어놓을 겁니다"(「당신의 고향집에 와서」,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여기서 "사랑"과 "민달팽이" 사이에 자명한 유사성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시인이 제 완력으로 둘을 강제로 붙여 놓자, 이제 저 문장을 읽는 우리들은 뒤늦게 유사성을 '부여'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사랑은 민달팽이처럼 느리게 오는 것일까?' 혹은 '집이 없는 민달팽이처럼, 사랑도 거처 없이 방랑하는 속성을 가졌을까?' 등등. 이때 우리는 이 한 구절만을 놓고도 무한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의 의미로 수렴하는 비유가 아니라 무한히 발산하는 비유이고, 덕분에 이 문장은 명확한 한 가지 의미를 갖는 문장이 아니라 끊임없이 의미가 생성되는 문장이 되는 것이다.

ㅡ 이것은 시의 유통기한과도 연관 있다. 어떤 시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영원히 아름다울 것만 같은데, 그런 시들은 (반드시 그런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명쾌한 한 가지 의미로 수렴되지 않는다. 읽는 사람에 따라, 혹은 읽히는 시대에 따라 계속해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시들. 그런 시들은 대부분 저런 탁월한 비유를 가졌다. 시인이 자명한 유사성 아래 대상들을 묶어 놓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합해 있는 두 대상에게서 독자들이 유사성을 부여하게 만드는 것. 바로 그러한 경지가 최상급의 비유가 아닐까. 최근 밴드 잔나비의 노래를 듣다가 발견한 가사 한 부분을 소개한다. "낮잠이나 한 구절 자볼까"(<레이디 버드>). 그는 여기서 "낮잠"을 세는 단위를 발명했다. "한 구절"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낮잠"을 '시'(혹은 '노래')로 은유했을 텐데, 이들 사이에 무슨 유사성이 있는가. 정해진 유사성은 없다. 이 놀라운 가사를 듣고 있는 우리가 거기에 무한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잔나비의 저 가사는 시적인 것이 아니고, 그냥 시다.



ㅡ 서론이 길었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당신이 지금까지 나온 진은영의 네 권의 시집 중 아무거나 골라서, 아무 페이지나 펼친 후, 아무 데나 손가락으로 찍으면, 그곳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한 '최상급의 비유'가 별거 아니라는 듯, 아무렇게나 적혀 있을 것이다. 기껏해야 100쪽이 겨우 넘어가는 (소설에 비하면) 아주 얇다고 할 수 있는 시집 한 권을 읽는 일이, 나는 왜 이렇게 오래 걸릴까 자문해 본 적 있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이제 너무 쉽다. "우리의 사계절/시큼하게 잘린 네 조각 오렌지"(「우리는 매일매일」)와 같은 비유들이 가득한 이 시집을 지대로 읽기 위해 1년이 걸린다고 해도, 그것은 너무 빠를 것이다.



11.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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