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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by 영화하는 이모씨

주인공은 시련을 겪어야 한다.

그런데 그 시련의 크기는 정말 엄청나게 민감한 문제이다.

시련이 강할수록 주인공이 헤쳐나가야 할 몫이 많아지니

그만큼 스토리는 흥미진진할 것 같지만 한없이 무겁다고 재미있는 스토리가 되지는 않는다.

주인공이 그 짐에 깔려 옴짝 달짝도 못하고 깔려 죽어버리면 말짱 도루묵이니 말이다.


남편은 멸치육수에 요리를 하면 귀신같이 알아챈다.

끝맛에 따라오는 미세한 쌉싸름함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사람이 흑맥주는 달단다.

쓴맛으로 따진다면 멸치 육수보다 100배는 더 쓸 텐데 이게 웬 말인가!


이 차이는 간단하다.

쓴맛을 각오하고 마주하느냐 쓴맛을 예상치 못하게 마주하느냐.


스토리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소비자가 이 스토리의 바라는 정도를 기민하게 알아야 한다.

이건 어찌 보면 소비자에게 공개할 시점에서야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절대 아니다.

만들다 보니 멸치육수가 아니라 멸치액젓이 되어버렸네?
그럼 멸치액젓으로 팔면 되지!


버리는 것 보다야 낫다 하지만, 이런 일은 없다.

스토리라는 게 이렇게 얻어걸리는 것이 아니다.

내 상품을 소비할 대상을 이해하는 것, 그것은 상품을 만드는 사람에게 아주 기본적인 일이다.

그런 차원에서 시련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나의 고객에게 어떤 크기의 시련을 줄 것인지는 얼마나 큰 성취감을 줄것이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무조건 큰 성취감이 좋아 보이지만 절대 아니다. 그건 지극히 결과론적인 것이다.

큰 성취 앞에는 반드시 큰 노력, 큰 애씀, 큰 애탐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앞서 예를 돌은 로코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품에서 너무 무거운 시련은 부담스럽다.

팬시한 완구를 시커먼 색깔로 칠하지 않는다.


이모는 다양성영화, 예술영화와 같은 카테고리로 엮이는 영화들을 볼 때 몇 가지 루틴이 있는데

1. 밥을 든든히 먹고

2. 피로하지 않은 상태에서

3. 간식 없이

본다.

이런 작품들이 보통 지루해서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들은 보통 이상의 무거운 시련으로 관객을 피로하게 만들곤 하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훌륭하지만 감정적 피로도가 높은 것은 어쩔 수 없다.


묘사는 이래서 어렵다.

무조건 선명하고 세기만 해서는 결코 안된다.

이 상품에 기대하는 것만큼만 무거워야 하고 각오한 만큼만 심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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