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창’만 해도 창가를 부르는 소리꾼 한 사람이 다양한 인물들을 감정을 대변하며 그들의 스토리를 들려주는 방식이다.
물론 그분들이 엄청난 감정 연기를 보여준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겠으나 일단 창극자체가 1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짊어지고 가는 것만 봐도 스토리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소리꾼 1인의 공연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한 공연방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반해 서양의 연극은 각 인물들을 맡은 다양한 배우들이 무대에 올라 조금 더 사실적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보여주었다. 창극의 소리 꾼이 들려주는 스토리를 관객들이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 가며 비주얼라이징하며 극을 즐기는 구극에 비해 서양극의 형태를 빌어온 신극은 좀 더 직접적이며 명확하고 그래서 더 강렬하게 관객의 감정을 조종했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상상할 필요 없이 직관적으로 보이고 들리는 것을 즐기니 더 쉽고 더 자극적으로 느껴졌으리라.
그렇다 보니 구극의 입장에서 보면 ‘연극의 본래의 예술성보다는 흥행을 위주로 한 연극’으로 보였을 것이다. 뭔가 은근하고 묵직하기보다는 즉각적이고 감정적인 극이 못마땅했을 테니 말이다.
‘저속한 흥미본위의 극’이라니... 모르긴 몰라도 관객들이 구극에 비해 열광했나보다.
그런데 그때의 기준대로라면 요즘의 상업영화나 드라마는 몽땅 신파극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본래의 예술성에 반하는 저속한 흥미위주로의 극이라고 폄하되어야 마땅하다.
예술적이지 못한 <기생충>이 칸느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저속한 <오징어게임>이 아카데미에서 수상을 하는 일은 벌어질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말하는 ‘신파’는 분명 이전과는 다른 의미인가 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신파’에는 여전히 부정적인 정서를 내포하고 있는 것만은 변함없다.
신파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1. 멜로스토리에 근원을 두어
2. 눈물을 흘리며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3. 감동, 눈물, 애틋함, 희생, 무한 사랑을 포함한
4. 서구적 드라마 형식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똑 떨어지는 구조이면서
5. 작위적인 반전이나 극단적인 감정 자극을 위한 반복성 등이 가미된
과 같은 다양한 필요조건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예 1) 부모가 자식을 위해(혹은 그만큼 의미가 있는 관계에서) 무한한 희생을 감수한다. 예 2) 남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건 복수를 한다. 예 3) 가족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다.
이런 스토리는 모두 신파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않다.
똑같은 배우가 나오고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비상선언>은 신파라고 욕을 먹고 <브로커>는 휴머니즘이라고 상을 받는 걸 보면 위에서 말한 저 서사들이 무조건 신파를 만드는 것은 아닌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