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서 가끔 불거지는 성폭행‧성추행 같은 단어에 대중은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슬픈 일이지만 팩트다. 그만큼 피로감이 큰 주제다.
간절한 호소가 진실로 와닿지 않는 사회가 돼버린 탓도 있다. 팩트 여부와 관계없이 세간의 쑥덕댐으로 인해 논의의 본질이 흐려질 때가 많다. 상처를 입은 자는 더욱 어두운 곳으로 숨고, 상처를 입힌 자는 가면을 쓴 채 떳떳하게 다닌다.
나도 간접적인 피해자다. 대학을 졸업하자 마자 다닌 회사에서 추악한 사회의 이면을 목격했다. 회사 더 다니라고, 일 잘할 것 같다고 붙잡는 상사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6개월 만에 회사를 나온 이유이기도 했다.
‘그 일’은 내 송별회에서 벌어졌다. 우리 부서 선배들을 비롯해 나보다 몇 살 어렸던 동료 A, 다른 부서 부장 B 등이 앉아있는 술 자리였다. 식사 후 가볍게 맥주 한잔 하는 자리였지만 B는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다들 각자 떠들고 있던 어느 때, B가 옆에 앉아있던 A에게 맥주잔을 내밀며 말했다.
“우리 뽀뽀할래?”
아주 급작스럽게 꺼낸 말이었지만 테이블에 앉은 모두에게 똑똑히 들렸다. B는 사태 파악을 못하고 똥 씹은 표정의 A를 능글맞게 바라봤다. 그들과 마주보고 앉아있던 나는 얼음처럼 굳었다. 나 뿐만이 아니라 음악이 뚝 끊긴 듯 테이블 전체에 정적이 흘렀다. 30대 남자 선배 하나가 “부장, 그 말씀은 심하십니다”라는 식으로 저지시켰다. B는 그제야 불현듯 실수했음을 느꼈는지 움찔했다. 아무런 사과없이 자리를 떴다. B의 동료 부장은 A에게 “니가 이해해라”라고 말했다. 어느 누구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신체적 접촉은 없었지만 얼굴을 마주보고 아주 가까운 자리에서 말했고, 상대방이 불쾌함을 느꼈기에 분명한 언어적 성추행이었다. 대수롭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퇴사를 한 후로 한동안 그 일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 한 달 후쯤 A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그날 이후 B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못했고 A는 B와 얼굴을 마주치며 일하고 있다고 했다. A는 정신적 고통을 앓고 있었다. 테이블에 있었던 선배들 모두 진실에 대해 함구했다. 누구는 B에게 유리한 쪽으로 증언하기도 했단다. 그 말에 의기가 솟아올랐다. 어차피 난 퇴사한 몸이니 괜찮지 않을까. 앞뒤 재지않고 총대를 멨다.
개인SNS에 그날 보고 들은 일을 적었다. 익명으로 작성한 글임에도 그 파급력은 엄청났다. 나와 친구를 맺고 있던 회사 다른 부서 직원이 내 게시물을 퍼트렸고, 내가 소속해있던 부서 선배들에게까지 퍼진 모양이다. 업로드 20여 분 만에 휴대폰에 전화벨이 울렸다. 그날 술자리에 함께 있던 유부녀 선배였다.
그 선배는 나를 걱정해주는 척 하다가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게시글을 내리라는 얘기였다. 그러기 싫다면 회사 징계위원회에 증언을 하라고. 그럴 듯하게 포장돼있었지만 결론 적으로 그 말이었다. 그는 방관자 중 한명이었기에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었다. 괘씸했다.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선배들까지 차례로 연락이 왔다. 카톡으로, 문자로, 전화로. 내가 2차 피해를 입을 걸 걱정하면서도 ‘글을 내려달라’는 핵심에선 벗어나지 않았다.
나는 글을 그대로 뒀다. 나중에 들으니 부장 B는 한 달의 휴직 처분을 받았다. A는 회사와 계약이 끝나 일을 관뒀다. B는 A의 퇴사 후에 복귀해 일을 했다. 정말 불공평한 처사였지만 그 일을 마음속에 묻기로 했다는 당사자 A를 위해 내가 할 일은 별 게 없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미래를 응원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의 본질은 B가 A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는 거였다. 그러나 사과는 끝까지 이뤄지지 않았고 A는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힘없이 회사를 나와야했고 정규직인 B는 옐로우카드만 받고 끝났다. 무엇보다 내가 SNS에 글을 올렸을 때 보여준 방관자들의 반응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를 ‘배신자’로 몰아간 이들이 다름 아닌 기자라는 사실에 소름이 끼쳐와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진실공방’이 포털사이트 메인에 오르내릴 때면 냉정해진다. 왈가왈부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그 현장에 있었냐고. 당하는 사람이 꾸는 악몽을 짐작이나 해봤냐고.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다. 더러워서 피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