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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bambi Jul 21. 2018

결혼을 할 수 있다는 것

오늘날 자주 보이는 갈등 중 어떤 유형은 스스로 자신이 어떤 면에서는 기득권이라는 것을 인식, 혹은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그런 싸움에서는 서로 자기가 더 약자라고 주장한다. 자신이 더 약자이고, 그러니까 더 적은 권리를 누리고 있고, 그렇지 않은 너는 좀 닥치라는 것이다. 일단 공론장에 나오면 약자라는 정체성은 그의 발언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억압받는 사람들, 그리고 소수자는 '목소리를 빼앗긴' 사람들이다. 힘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믿지 않고, 무시하고, 투명인간으로 만들려고 한다. 또한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현실의 영역을 정하며,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를 그 밖으로 밀어내고 은폐하려 한다. 사회의 발전은 목소리를 낼 수 없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되찾고 정당성을 얻고 권리를 찾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이제 막 목소리를 되찾은 소수자들도 여전히 소수자이며, 그들에게는 여전히 힘든 싸움이 남아 있다. 하지만 아직 공론장에 참여할 수 없는, 목소리가 없는 사람들도 있고 그들의 존재를 의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 말할 자격도 목소리도 있는 사람들, 말할 자격은 있지만 목소리가 없는 사람들이 모두 다르다. "한국에선 보수라고 밝히는 게 동성애자가 커밍아웃 하는 것보다 힘들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 구분을 혼동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기득권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고 몹시 어색한 일이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며 인정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어휴 제가 무슨 기득권입니까'라고 말하며 더 많이 가지려고 하며 나누려 하지 않는 것 같다. 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정체성은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구분에서는 다수에 속하지만, 또 다른 구분에서는 소수에 속한다. 그러니 대부분의 논쟁에 우리는 다른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고,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약자를 위해 증언해야 하며, 또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발언권을 양보하고 그저 잠자코 있어야 한다. 


요즘 나오는 많은 책들은 '나에게 잘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나는 약하고, 나는 무해하고, 나는 상처받았고, 이 세상이 나쁘다. 그러니까 나라도 나에게 잘하자는 것이다. 물론 나도 그 중 어떤 것들은 좋아한다. 공감하고, 위로를 받는다. 하지만 좀 더 다양한 시각의 책들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타인의 아픔과 권리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시혜적'이지 않은 시각으로 사회의 억압과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 또 모든 사회 변화를 위한 운동에 '당사자성'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며칠 전 기사에서 '유전결혼 무전비혼'이라는 말을 보았다. 20-30대 남성 노동자 임금 하위 10%(1분위)의 기혼 비율은 6.9%, 상위 10%(10분위)의 기혼 비율은 82.5%라고 한다. 여성의 경우에도 소득 9분위, 10분위의 기혼 비율이 소득이 더 낮은 집단에 비해 훨씬 높다. 오늘날 비혼을 선택하는 사람도 많지만 결혼을 안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우리가 결혼을 하는 것도 결국 결혼식을 치르고 결혼을 할 수 있을만한 수입이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의 측면에서 보면 성인이고, 이성애자이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인정하는 방식으로 결혼을 하며,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앞으로의 삶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나와 배송비는 이 사회에서 어떤 면에서는 약자겠지만 대부분의 카테고리에서는 소수자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임노동자이다. 나는 여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동 청소년이 아니고 장애인이 아니다. 퀴어도 아니고 극빈층이 아니다. 이 나라에서는 외국인이 아니며 동물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연대하며 증언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더 잘 들릴 수 있도록, 정당성과 신빙성을 가질 수 있도록 나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어떤 논의에 있어서 우리가 말할 자격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자격으로서 말할 수 있는지 살펴야 할 것이고 계속 배워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을 잊지 않기 위해 이렇게 기록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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