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단추
이 회사에서 보낸 첫 몇 달 동안 사람들이 농담인지 아닌지 알쏭달쏭하게도 '넌 우리랑 밥 먹기 싫은가 보다'라고 했다. 치즈 인 더 트랩의 명대사를 연상케 하는 이 말은 내가 내 일이 끝나면, 또 점심시간이 50분 이상 남아있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밥을 사러 달려 나가는 바람에 나온 것인데 그보다 먼저 내가 상사 말을 똑바로 못 알아들은 데에 원인이 있다. 회사에는 직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첫날 윈도우 세팅을 하는 나를 보고 상사가 '너 비밀번호 설정했니?'라길래 '어 방금 했지'라고 대답을 했으나 그 번호가 그 번호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리 회사 돌아가는 게 바쁘고 시간이 없어도 사람이 3주 동안 한 번도 휴게실에 안 들어오면 '휴게실을 안 쓰는 이유가 있니?'라고 물어볼 법도 한데 나는 나대로 휴게실의 존재 자체를 몰랐고, 그들은 처음부터 내가 어울릴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말아서 오해는 한참이 지나서 풀렸다.
점심 사러 나갈 시간이 전혀 안 나길래 회사옆 슈퍼에서 급히 사온 샌드위치를 탈의실에서 먹는 나를 센터장이 발견한 것이다. 그이는 '왜 여기서 먹니?'라고 했고, 나는 머릿속으로 '여기가 아니면 민원실에서 먹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들 나처럼 하루종일 불특정다수의 숨결로 가득 찬, 환기가 안 되는 후텁지근한 공간에 1초라도 머물기 싫어 뛰어나간 줄만 알았다. 먹는 걸 정말 좋아하는 나는, 하루가 힘든 만큼 먹는 것으로 보상하려 했기에 점심만은 꼭 맛있는 걸 먹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교육이 끝나자마자 어디 나갈 시간을 확보하기 어려워져서 곧 중단되었다.
첫 단추를 잘못 꿰어서 그런 것이었을까? 유독 내가 먹는 것의 가격을 궁금해하고 영수증을 뒤져 말해주면 큰소리로 ‘와 비싸!!’, ‘제기랄 너무 비싸!!’라고 하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슈퍼에서 사 온 캐러멜맛커피와 PB제품 샌드위치였을 뿐인데. 매 끼니가 저런 식이니 일도 이 모양인데 점심시간에도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생각에 나도 기분이 안 좋아졌다. 그들 중 하나는 날더러 밖에 음식을 사러 나가면 자기 몫도 사다 주면 안 되겠느냐 하기에 사다 주었더니 꼭 1,2유로를 빼고 주기에 끝까지 집요하게 쫓아가며 받아냈던 기억이 난다. 문제는 의외의 부분에서 해결되었다. 언제 잘려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조금은 잘라주길 바랐던 내가 처음으로 부스 밖으로 나가 민원인과 드잡이를 하고 온 날 보안요원을 불러온 동료들이 위에서 말한 매번 '비싸!!'를 외치던 사람들이었는데, 거짓말처럼 다음날부터 얌전해져서 다른 사람들 대하듯이 나를 대했다. 그 후로 다시는 비싸!! 라고 고함치지않은 걸 보면 딴에 괴롭힘이라고 한 일이 맞는가보다.
사람들 태도가 다시 눈에 띄게 상냥해졌던 적이 또 한 번 있다. 손목이 점점 안 좋아져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바로 병가를 처방해 버려서 처방받은 2주 중 1주만 쉬고 돌아갔을 때인데, 고정적으로 병가를 내는 사람이 몇 있어도 내가 낸 적은 없었기에 신입이던 내가 맡은 단순작업에서 한 명이 빠지니 빈자리가 나름대로 컸던 모양이다. 업무환경이 너무 살벌해서 다들 크고 작게 짜증을 부리거나 늦게 와놓고 자기가 좋은 자리를 못 잡았으니 비키라는 생떼를 쓰는 일도 가끔 있었지만 이런 환경에서 그 정도 심술부린 게 다라면 아주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곳에서는 하루종일 자기 하는 일 외에는 보거나 신경 쓸 여유가 많지 않아서 남들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실수를 하는지 알 기회가 없었는데 그런 통에 나는 내 실수들을 되새기며 내가 못 써먹을 일꾼이라는 생각을 가끔 했었다. 그런데 병가가 끝나 돌아오니 사람들이 제발 다신 떠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보고 내가 영 못써먹을 일손은 아니었나 보다 생각하게 되어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다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이곳에서 머무르며 늘 궁금했다. 무거운 것을 드는 동작, 넘기는 동작, 찍어 누르는 동작, 바코드를 읽는 동작이나 컴퓨터 조작 그 외에도 손목을 써야 할 일이 수도 없이 많아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한번 병가를 쓰고 그 후로도 계속 보호대를 차며 일했는데 의외로 손목 문제로 호소하는 동료는 많이 보지 못했고 이곳에서 가장 일한 동료 중 한 명이 의문의 알레르기로 정말 뜬금없이 어느 날 말벌에 쏘인 사람처럼 온몸이 부어 병가를 쓰게 된 적이 있는데, 이 사람과는 지금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있지만 이 알레르기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한다. 근무강도가 강도이다 보니 스트레스 때문이 아닐까 짐작만 하고 있다.
'좋은 사람들은 다 떠나는구나' 내가 퇴사 사실을 알렸을 때 동료들이 말했다. 첫 단추는 그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나와 일하는 시간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싶어 안심했다. 나는 미운 정이라는 말을 별로 실감하지 못하며 살았던 편인데,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보며 미운 정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비록 안 그래도 피곤해서 코가 늘어지는 아침 느지막이 출근을 처 해놓고 내 앞에 나타나 뻔뻔하게도 내가 앉은 책상을 내놓으라며 생떼를 쓴 적이 몇 번 있는 너지만, 그런 너라도 이런 마굴에서 더 일하는 건 너무 심한 처사라고 생각하는 것. 비록 남들이 저질렀을 땐 네가 아무 말도 안 하는, 마우스 클릭 하나로 고칠 수 있는 실수지만 내가 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루 내내 내게 생짜증을 내며 다른 동료들한테 내 얘기까지 해버린 못 말리는 너지만 지금보다는 병가를 덜 쓰는 건강한 네가 되길 바라는 것. 미운 정이란 그런 마음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