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혜원

여자라는 수치심

by mamang


• 체온이 오르면서 내 몸이 오염물을 씻어내려고 연기를 뿜어냈다. 그 오염물을 바로 나였다.(110쪽,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 수치심은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 같아서, 집 밖으로 잠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도 수용체가 자극받아 나를 반응한다. 체면을 잃는 것과는 다르다. 수치심은 내 얼굴을 깔고 앉아버린다.(109쪽,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존재 자체가 수치스럽다는 생각은 나에게 숨 쉬듯 익숙하다. 먼지처럼 가벼워 쌓이는 줄도 몰랐던 그 수치심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납작하고 단단한 것으로 변해갔다. 툴툴 털어버릴 수 있는 것에서 날을 잡고 힘겹게 긁어내야만 하는 찌꺼기 같은 것이 되어 내 마음에 엉겨 붙었다. 여성이 소수자가 되어야 하는 직장에서 일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 그 찌꺼기는 품을 들여 겨우 긁어내도 이곳저곳에 얼룩과 흔적을 남긴다. 나중에는 외부의 작은 자극에도 순식간에 본래의 성수기적 크기를 찾아 금세 마음 한편에 자리를 잡는다. "여성이라는 것이 역시나 나의 단점이구나"하고 본래 믿었던 마음을 확인하게 되고 나는 다시 수치심으로 옷을 지어 입는다.


돌이켜보니 지난 시간 동안 나는 그 옷을 한 번도 벗어본 적이 없는 듯하다. 직장에서의 크고 작은 마찰과 갈등 그리고 문제 해결에 있어서 나는 항상 나의 성별을 문제 삼았다. 이런 패턴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끈덕지게 따라다니며 괴롭게 만들었다. 크고 작은 일들이 쌓이고 해소되지 않는 자격지심은 매일같이 커졌다. 10년이 지나 돌이켜보니 나는 하루도 쉬지 않고 내가 여성임이 불편했고 그로 인해 불행했다. 어느 누구도 부추기지 않았는데 나 스스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는 식이다. 그 방식은 타인의 모든 행동의 원인을 찾는 것인데 그 원인이란 매번 내가 여성이라는 불편함에서 시작되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너희 내가 여자라서 나에게 이러는 거냐!"는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소수자의 수치심이 나를 각성시켰다. 울컥했고 팔다리가 아프기까지 했다. 쉬어가며 읽고 싶은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급한 마음에 책장을 쉼 없이 넘긴다.


"네가 태어나고 온 가족이 울었다"라고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들인 줄 알고 너를 낳았다" 말하던 젊은 엄마는 나에게 소수자로써 불행할 운명을 손에 쥐어준 게 분명하다.

초등학생인 나를 앉혀놓고 엄마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당시 내가 느꼈던 최초의 미안함과 수치심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감정과 함께 순간 찾아왔다. 예고 없이 찾아온 감정의 흔적은 오래 남았다. 그 뒤 나는 단 한순간도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엄마에게 아주 큰 빚을 진 기분이 들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날의 엄마는 마치 빚을 돌려받으러 온 빚쟁이와 같이 당당해 보였다. 그녀 앞에서 나는 주머니를 뒤집어 탈탈 털었다. 내가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이랄지 애교 많은 딸 역할이랄지 등 돈이 들지 않지만 영혼이 쓰이는 일을 해야 했다. 그렇게라도 영원히 갚아야 할 빚 같았다.

아빠와 엄마가 소리 지르며 싸우던 날이 있었다. 그 정도의 마찰은 자주 있었으니 곧 잠잠해질 거라 생각하고 기다렸다. 언니들과 나, 할머니는 안방에서 거실을 두고 조금 떨어진 할머니방에서 잘 준비를 마치고 잠의 경계선에 놓여 있었다.

그때 와장창 하고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 속에 들어가 할머니의 젖을 찾았다. 할머니의 냄새를 맡고 어서 잠이 찾아오길 바랐다. 아빠는 안방 문을 걸어 잠근 엄마를 혼내줘야겠다고 생각한 듯했다. 돌로 안방과 베란다 사이의 창을 깨뜨리고 방에 들어갔고 큰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엄마 아빠가 서로를 향해 질러대는 소리가 사실은 나를 향한 원망인 것처럼 들렸다. "쟤가 여자로 태어난 게 내 탓이야?" 하고 엄마가 외치는 것 같았다. "나는 밖에서라도 아들을 낳아올 거야!"라고 아빠가 대답하는 것 같았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언니들과 내 바로 옆에 누워있는 할머니도 나의 존재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에게서 떨어져 나와 귀를 막은 채 벽으로 몸을 돌린다. 차가운 벽에 이마를 대며 어린 나는 생각한다. 그러게 나는 왜 여자로 태어났을까. 나의 수치심이 그날 내 얼굴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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