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엄마의 딸로 산다는 것

우울은 물 들여지는 것

by mamang

우리 엄마 이름은 순자다.

옛날에는 왜 그렇게도 아들을 원했는지 우리 엄마들 이름에는 아들'자'가 참 많다.


우리 할머니 이름은 복덕이다.

좋은 뜻은 다 들어있는 할머니의 이름은 참 특이하다.


순자 씨와 복덕 씨는 40년 넘게 한 집에 살고 있다.


엄마는 번번한 직업이 없는 아빠의 외모에 반해서 결혼을 결정했다고 한다.

아빠는 엄마가 대낮에 맥주를 원샷할 줄 아는 여자라서 이 여자면 되겠다 싶었단다.


아빠는 그렇게 엄마와 결혼을 했는데 신혼 초 몇 년 동안은 수입이 하나도 없어서 할머니 혼자 사시는 시골집에 얹혀서 살았다고 한다.


할머니는 전국으로 돌아다니면서 바쁘게 사업을 하며 바쁘게 연애도 하는 (망할 놈의 느그) 할아버지 때문에 고생을 말도 못 하게 했다(고 한다).


혼자서 남의 땅 농사를 하면서 힘들게 지내고, 할머니의 고생은 나 몰라라 하는 할아버지는 다른 곳에서 낳아온 자식들을 맡겨놓고 자유롭게 전국으로 다녔단다.


참 신기한 게 할머니는 그렇게 맡겨진 남의 자식들을 열심히도 정성스럽게도 키우셨는지 나는 고모와 작은 아빠 두 분이 아빠랑 배가 다르다는 사실을 중학교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우리 엄마 순자 씨는 지금도 한탄하며 하는 이야기가 있다.


아빠랑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할머니에게 얹혀 지낼 때 할머니에게 조심스레 밥 조금 더 먹어도 되는지 여쭤봤더니, 할머니는 "돈도 못 벌어오는 것들이 밥은 많이 먹는다"라며 면박을 줬던 게 지금도 너무 마음에 상처로 남아있다고 한다.


4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지금은 먹고도 남을 쌀밥이 있지만, 그때의 일이 너무너무 서운하고 속상하단다.


사람들은 우리 엄마에게 "그런 시어머니 없다"라고 한다.

자식 4명을 딸 셋에 아들 하나. 젖먹이 때부터 하나씩 모두 손수 키워서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고 딸 셋은 시집도 다 가고 이제 하나 남은 손주도 의젓한 대학생이니 말이다.


우리 엄마 아빠는 30년 넘게 연중무휴로 식육 식당을 했다. 우리 4남매에겐 항상 할머니가 있어줬다.


아침에 깨워주고 아침밥 먹여서 학교 보내고 하교하면 간식 챙겨주고 저녁 먹이고 재우고. 내가 기억하는 한 할머니는 동네 교회 집사님들과 주일 예배 함께 드리는 것 말고는 친구를 만나러 나간 적도, 낮에 집을 비워서 우리로 하여금 대충 챙겨 먹게 만들지도 않았다. 여름에는 모시옷을 지어 손수 입혀주고 해마다 재철 채소와 음식으로 우리를 배불리 키워주셨다.


할머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친절해서 주변 사람들이 모두 우리 사 남매와 엄마 아빠에게 참 좋은 할머니, 어머니, 시어머니를 두었다고 입이 마르듯 칭찬을 했다. 나 역시 우리 할머니 덕분에 친절을 배웠고 인사성을 배웠고 상대방을 대하는 예의와 배려를 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엄마 아빠와 보낼 시간이 부족했지만, 경제적으로는 크게 힘들지 않고 평탄하고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집에는 항상 할머니가 계셔서 정서적인 안정감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분명 안정적이었던 것 같았던 그 시기에 대해서 나는 한편으로는 아주 어둡고 우울했던 우리 집을 기억한다.


딸 둘에 이어서 나까지 딸로 태어나자 아빠는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고 했다. 우연히 주워들은 이야기이다.


할머니는 어느 날엔가 목욕탕에서 아줌마들에게 아들이 바람피운 미용실 여자를 찾아가 머리를 잡았다는 무용담을 이야기했다. 아마 당시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다녔던 내가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할 거라 생각했을 거다.


당시 나는 평소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고상한 줄 알았던 할머니가 진짜인지 누군가의 머리를 쥐어뜯는 할머니가 진짜인지 너무 혼란스러웠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어릴 때의 기억도 선명하게 남는 일이 있다.


자식들을 보는 대신 종일 일을 해야 했던 엄마는 할머니에게 자식들을 뺏겼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 눈치를 봤었는지 나는 할머니 앞에서 엄마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엄마 앞에서 할머니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너무 혼란스러웠다.




세 살 터울의 언니들은 집은 답답하다며 대학을 서울로 가며 집을 떠났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아빠가 뇌출혈로 쓰러진 지 1년밖에 되지 않아서 내가 같이 있어줬으면 한다는 엄마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본가에 남아 그 지역의 대학에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벗어났으면 어땠을까 싶다. 나도 서울로 대학을 갔으면 어땠을까. 멀리에서 마음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우리 집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또 딱 그만큼만 우리 집에 하면 됐을 텐데.


언니들은 본가에 한 번씩 내려올 때면 나에게 하는 말이 항상 "누가 해주는 밥을 먹어서 참 좋겠다"였다.


그때의 나는 그냥 밥은 안 먹고살아도 좋으니 이 집안의 우울감에 젖어들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했었다.


딸은 엄마의 우울을 먹고 자란다. 염료에 물이 드는 옷감처럼 딸은 아주 쉽게 엄마의 우울에 젖어든다.


엄마는 원인은 모르는 채 너는 참 나를 닮았다. 나처럼 살지 말아라. 나처럼 참지 말아라. 라며 충고를 널어놓는다. 때로는 우울을 나에게 묻혀놓은 엄마가 너무 원망스럽고 우울을 털어내지 못하는 내가 바보 같다.


집안의 불편한 우울의 주범이었던 우리 집안 남자들 할아버지, 아빠는 집안의 우울에 대한 근원을 알고는 있었을까. 알고는 있지만 순진한 얼굴을 하고 모른 체 하고 있는 걸까.


할아버지는 내가 결혼하고 두 달 정도 있다가 돌아가셨는데, 본인이 우리 집에 그리고 타고 타고 내려와 나에게 미친 영향은 알고 돌아가셨을까.


막내 손녀가 취직도 잘했고 출세했다고 돌아가시기 전에 보고 싶다고 했다던데. 나는 그 이야기를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들었다.


할아버지로 인한 할머니의 우울이 아빠에게, 할머니와 아빠의 우울이 엄마에게, 엄마의 우울이 나에게 전해져 온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적어도 내 우울을 여기에서 끊어내고 싶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할머니와 엄마가 나에게 보여줬던 화풀이하는 모습, 성내는 모습들이 나에게도 나타나서 내 옆의 소중한 사람을 아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