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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mang Aug 02. 2023

유한한 엄마의 시간, 끝없는 모녀의 싸움

최현숙 <작별 일기>, 후마니타스

최현숙 <작별 일기> 후마니타스, 2019.09.30.




마음이 힘들 때 스스로 책 처방을 내린다. 나의 내면 아이를 달래주기 위해서다. 책을 읽으며 아이는 마음껏 울거나 시무룩해지거나 기뻐하며 감정을 분출한다. 주로 침묵 속에서 벌어지는 이 일들은 나만 알 수 있는 내 마음속에서 벌어진다.


책 한 권으로 끓어오르던 마음이 가라앉을 때는 감사한 일이고. 한 권으로 그렇지 못하면 다른 책을 처방하면 될 일이니 마음 편하게 가지면 된다.


물론 말로는 쉽다. 사실 마음 안에서는 내면 아이가 마구 물건을 집어던지고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불고 떼를 쓰는 통에 아비규환이다.


본가에 다녀오면 딱 이런 마음이 된다. 내면아이가 평소에는 머리도 잘 감고, 옷도 잘 차려입고, 물건 정리도 잘 하는데. 부모를 만나고 오거나 원가족과 있었던 온갖 서러운 일들(좋았던 일들은 이럴 때 꼭 떠오르지 않는다)이 줄줄이 매달려 나온다. 본가를 벗어나 며칠 조용한 집에서 지낸 후에도 확 뒤집어진 마음이 잠잠해지지 않는다.


최현숙 작가의 <작별 일기>는 본가에서 마음이 뒤집어질 때마다 펴보려고 미리 처방을 내려 구매해간 책이다.


본가에서 나는 책을 펼쳐볼 사이도 없이 마구 휘둘리다가 겨우 풀려나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야 겨우 펴볼 수 있었다. 이번엔 처방이 적확했는지 책을 읽으며 기차 안에서 속수무책으로 펑펑 울어버렸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이유는 나의 부모가 가진 시간적 유한함을 절대 잊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책을 읽고 나니 내 마음이 조금 다른 방향으로 비켜섰다.


“내가 언제 죽을지 몰라 너희가 알아야 할 것들을 적은 노트를 항시 침대 옆에 둔다”라고 말해오던 엄마의 말을 막고 화제를 돌리기 바빴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엄마의 말이 마치 “나에게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라고 말하며 자식들의 효를 끌어내기 위한 협박이었다는 꼬인 생각까지 했었는데.


이제야 그녀는 ‘죽음’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자식들과 나누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결혼 이후 평생을 돈 때문에 안절부절못한 엄마에게 상처도 받고 미워도 하고 흉도 보며 자란”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많은 위안을 받았다. 나를 잉태한 여자와의 극적인 화해, 서로에 대한 용서는 아니지만 내 안에서 엄마를 견뎌보고 싶은 질긴 인내심 같은 것을 건져올린 기분이다. 이것은 나에게 무엇보다 유효한 처방이 될 것이다.


아니, 이미 효력이 느껴진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내 부모도 나도.


 <작별 일기> 의 15문장


  결혼 이후 평생을 돈 때문에 안절부절못한 엄마에게 상처도 받고 미워도 하고 흉도 보며 자란 다섯 남매는 그 돈으로 자라 이제 예순셋에서 마흔아홉까지 되어 있다.(34쪽)

 엄마는 자신이 의논 상대가 된다는 것에 단박에 기분이 좋아졌다.(35쪽)

 어떤 남편을 만났든 엄마는 소위 ‘살림만 하는 여자’는될 수 없는 여성이었지만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만 하는 여자가 젤로 부럽다”라는 넋두리를 자주 했다.(113쪽)

 엄마는 내게 열정을 물려준 여자다.(121쪽)

 그러다 어느 날 내 안의 어린아이가 불쑥 올라와, 말귀도 못 알아듣는 늙어 빠진 엄마를 붙잡고 혼자 울고 있었다.(205쪽)


 인생이란 게 그렇듯, 늙어 가는 부모에 대한 돌봄 역시 무엇이 최선이었는지 부모의 죽음 후에도 모르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249쪽)

 노쇠와 해체는 잠시 머뭇거리기는 해도 가차 없이 다가온다.(267쪽)

 죽음은 순간이다. 문제는 늙어 죽어 가는 과정이다.(308쪽)

 내가 보기에 엄마는, 몸의 부분들이 각각 부서지다가 이제 그 부서짐들이 하나둘 연결되어 한 덩어리씩 뭉텅뭉텅 붕괴되어 가는 느낌이다.(310쪽)

 오늘 모든 걸 마치고 타운으로 돌아오다가 엄마는 뜬금없이 “사느라 모두 애쓴다”라는 말을 했다.(311쪽)


 그녀가 들려준 많은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떠올려 재해석하며, 나와 세상 안에 그녀의 생애 경험과 의미가 존재하고 활동하게 하는 것, 그것이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남은 사람으로서 내가 할 유일한 역할이며, 그녀를 향한 나의 애도이다.(328쪽)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살 만한 자들 간의 소문뿐일 수도 있다.(336쪽)

나를 잉태해 열 달을 품고 있다 낳은 몸.(363쪽)

 고생 많았어요.(365쪽)

 죽음이 강력한 이유는, 모두에게 가차 없고 회복 불가능하기 때문이다.(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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