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딸 인생 9년 만에 나의 막내 자리가 위태로워졌다. 한글을 막 읽을 줄 알게 된 그때, 부모님의 식당 안방에 나 보란 듯이 놓여있는 산모 수첩을 보고 알았다. 사실 산모가 무슨 뜻인지 알 리 만무한 어린 나이였지만, 나의 눈치코치는 육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화곡 식당 셋째 딸의 인생이 크게 바뀔 거라는 것을.
동생은 참 귀엽긴 했다. 꼬물거리는 손꾸락도 발꼬락도 손가락, 발가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귀여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동생이 우리 집에 온 첫날 엄마 쭈쭈를 먹고 잠을 자다가 침대에서 토를 했는데, 나는 너무 놀라 울기까지 했다. 동생이 걱정되어서 그랬다. 물론, 내가 그동안 했던 언니들의 심부름을 인수인계해 줄 기대감도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분명 코딱지만 한 내 동생이 깨어질까 녹아내릴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동생을 보살폈던 기억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을 때, 엄마가 그 기억의 왜곡을 바로잡아주었다. 내가 9살이고 동생은 엄마의 배를 가득 채울 만큼 예쁘고 거대하게 자라고 있었을 엄마의 만삭 무렵이었다. 엄마가 거실에 있는 소파에 힘겹게 모로 누워있었는데 내가 모른 채 다가오며 엄마의 거대한 배를 깔고 앉으려 했다는 거다. 나는 어린 나의 잔인함에 아주 놀랐는데, 그때의 나는 왜 그랬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여기에 일화 하나 더. 동생 머리가 조금 무거워졌을 때 즈음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는 중에 내가 동생을 엎어보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할머니가 "동생 잘 잡고 있어라" 하며 내 등에 동생을 올려주고 포대기를 둘러주기 전에 내가 동생을 놓쳐버린 것. 동생은 엘리베이터 바닥에 떨어져 버렸고 나는 한참 동안 집안의 대역 죄인이었다.
할머니, 엄마, 아빠가 줄줄이 서서 나에게 "네 동생 나중에 머리 나쁘면 책임질래?" 했다.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눈물을 그렁그렁 눈알에 매달고 잘못을 빌고 빌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혹여 그렇다 해도 그게 어찌 제 탓뿐이겠습니까.)
대략 15년 정도가 지나서 이 사건을 주워들은 동생은 "내 부진한 학업성취도의 원흉이 여기 있었군." 했다. "친애하는 동생아 그것이 어찌 미약한 나의 탓이겠니. 좀 더 공부에 박차를 가하렴." 하며 귀한 그의 뒤통수를때렸다. (물론 할머니, 엄마, 아빠가 안 계시는 곳에서)
신기하게도 나는 동생이 태어나기 직전과 직후에 일어난 몇몇 일들을 아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모처럼 어릴 때의 기억들이 분수처럼 샘솟는다.
* 터를 잘 팔았다 : 남동생이 태어나면 손위 누이가 많이 듣게 되는 말이다. 엄마 배 속에서 나오면서 아들이 태어날만한 터를 잘 닦아놓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닌데요, 저 500원짜리 아닌데요." 하고 말대꾸하지 못했다. '나는 정말 500원짜리 인가보다.' 했던 것 같다.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낳고 받았던 핍박을 나에게 간증했고, 어린 내 눈에도 내 동생이 태어난 후 가족들이 훨씬 행복해 보였으니까.
내가 엄마 배 속에 있었을 때, 배 모양을 본 사람들이 "이건 분명 아들 배야!" 했다고 한다. 드디어 아들을 갖게 된 엄마는 아빠와 할머니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고, 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가며 내가 어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런데 낳아보니 4.2킬로의 우량하고(생김새는 분명 아들과 같은) 건장한 딸이었는데, 그게 나였다. 아빠는 속이 상해서 술 마시느라 산부인과에 와보지도 않았고, 할머니는 병원에 오기는 했는데 와서 내내 울었다고 한다. (왜 굳이 이런 걸 나에게 말해줬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태어났을 때는 엉엉 울었으면서, 동생이 태어나고 나서는 할머니와 아빠, 엄마의 얼굴이 유난히 뽀얗기도 하고 발그레한 게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남동생이 첫 번째 생일을 맞이했을 때는 식당 문을 하루 닫고 돌잔치도 했다. 할머니는 여러 음식을 손수 해내느라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그날 내가 처음 본 음식이 하나 있었는데, 계란 과일 사라다였다. 할머니가 정성스럽게 계란을 익혔고, 그 계란을 손수 까서 그 안의 흰자와 노른자를 발라냈다. 흰자는 칼로 다지고, 노른자가 바스러질까 봐 손에 살살 쥐고 채에 조심스럽게 문질러서 만들어낸 노른자 가루를 뿌린 사라다를 마주했던 그때,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았다. 할머니는 나에게 한 번도 해준 적이 없는 음식들을 차례대로 만드는 마술을 부렸다.
동생이,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고추를 달고 나온 나의 남동생이 왜 특별하지? 항상 궁금했다.
6년을 기다려서 큰언니만큼 자라야 세뱃돈으로 만 원을 받을 수 있었던 나는, 어느 날 그놈이 나와 비슷한 액수의 세뱃돈을 받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우리 세 자매는 아빠 차 뒷자리에 구겨져서 타야 했고 심지어 나는 급정거를 하면 앞으로 튕겨 나갈 것 같은 불편한 가운데 자리에만 항상 앉았다. 그런데 덩치도 작고 안전벨트도 안 맞는 저 조그만 놈이 조수석을 꽤 차고앉은 것도 너무 놀라웠다.
남자가 그렇게 좋은 거면 나도 남자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항상 남자애들에게 지고 싶지 않아 했고, 그들을 많이도 때리고 다녔다. 엄마에게 "엄마 나 태권도 학원 다닐래"하면 엄마가 "얼마나 더 애들을 때리고 다니려고? 안돼!"하던 때였다. 무거운 걸 들 때도 남자애들보다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고, 공부도 항상 열심히 하려고 했다.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를 남녀공학으로 갔으면 지기 싫어서라도 공부를 더 열심히 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든다.
친구 한 명이 최근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왜 아직도 이렇게 열심히 살아? 이제 살살 좀 해."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열심히 살았어. 이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되게 열심히 하고 있다? 킥킥"
어쩌다 보니 화곡식당 셋째 딸은 남자들이 득실거리는 곳을 전공으로 택했다. 공과대학 중 여자는 대리 출석도 못 할 정도로 희귀한 토목공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이후 나는 역시 해 오던 대로 귀염받고 눈에 띄기 위해 성실하게 살았다. 체력도 남자들보다 한참 뒤처지고 정보도 그들보다 많이 부족했지만, 대학에 들어와서는 오른손 중지에 굳은살이 더 박이도록 열심히 노력했다. 양손을 꽉 쥐고 남자들 사이에서 선택받으려고, 잘 해내려고 말이다.
남자들이 주를 이루는 직장에서의 사회생활을 포함해 남초에서 총 16년을 보내온 지금, 돌이켜보니 나는 나 자신을 혼내고 닦달하며 억지로 여기까지 끌고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는 몸과 마음이 무척이나 힘들어지면서 회사를 3개월 쉬게 되었다. 덕분에 지난 시간을 하나하나 돌이켜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왜 그렇게 애를 썼는지 알고 싶었고, 애를 써온 지금의 결과는 어떤지, 이대로의 내가 정말 괜찮은 건지 큰마음을 먹고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렇게 찬찬히 지나간 기억을 꺼내서 주욱 늘어뜨려 보았다. 지긋지긋하게 울면서라도 버텨왔던 그 시간들을 돌이켜보니 나름 그 나이 때에만 할 수 있던 소소하고 예쁜 추억이 많았음에 놀랐다. 인기 많은 여학생이 되려면 게임을 잘해야 한다는 남자 동기들의 말을 듣고 피시방에 따라가 총 쏘는 게임을 배웠던 일, 취업 문 앞에서 번번이 당했던 거절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던 일, 남자직원들에게 지기 싫어서 마구 마시다가 술병이 나서 할머니 손잡고 병원에 수액을 맞으러 갔던 일, 막 취직한 후 힘겨운 회식을 마치고 꼬마 직원들끼리 편의점 앞에서 냉동 닭강정을 돌려 맥주에 먹었던 일, 시골 현장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무단 경작을 말리다가 얼결에 고구마를 얻어먹었던 일. 등이 그랬다.
나의 소소한 행복들과 큼직한 속상한 일들을 에피소드로 엮어 이 공간에 펼쳐보려 한다. 나의 우스갯소리들을 읽어 내려가며 여러분의 대학 시절, 신입 시절 그리고 중참이었던 시절의 추억을 떠올려주시기만 해도 영광일 것같다고 상상해본다.
직장에서 자신을 소진해버린 후 지난 시간을 후회하고 있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면 내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할 것 같은 나와 비슷한 사람들, 또 나만 이렇게 불행한건지 궁금한 사람들에게 앞으로 내가 꺼내 볼 에피소드들이 작은 위안이 되길 바란다.
때로는 "나만 그런 게 아니었네" 하거나, 또 그렇지 못해도 괜찮다. 나의 추억들을 손수 되짚어보며 잔뜩 주눅 들어 있던 대학생, 취업 준비생, 신입과 중고 신입이었던 때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내가 참 많이 기특하게 느껴졌으니까. 누가 나를 인정해 주고 비싼 값을 매겨주지 않아도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대단히 크고 확실한 행복이니까.
무엇보다, 나는 발끝에서부터 씩씩함을 끌어올려야 하는 '공대 여자' 말고 '그냥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