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독서실 생활

코로나 시대, 구직 중인 청년들에게(공대여자 말고 그냥 나)

by mamang
공대여자 : 나 독서실에서 또 쪽지 받았어.
친구 S : 뭐야. 이번엔 뭐래?
공대여자 : 발꿈치로 쿵쿵 걸어 다니지 말래.


독서실 재실자는 3가지 부류로 나뉜다. 합격한 사람, 포기한 사람, 남아있는 사람.


대학 졸업반 시절, 나는 취업 준비를 위해 독서실 생활을 시작했다. 나의 독서실 생활이 6개월쯤 되었을 때, 친구 J가 취업에 성공해 독서실을 먼저 떠났다. 그 후, 나는 남아있기로 했고 토목 여학우 중 한 명인 내 친구 S가 독서실에 합류해 공부를 시작했던 거다.


거의 모든 독서실이 그렇겠지만, 학구열과 합격률이 높은 독서실일수록 각 열람실의 민폐녀, 민폐남들에게 소음에 대한 경고 쪽지를 날리는 횟수가 많다. 남들은 커피 한잔하실 수 있냐는 쪽지도 받고 그런다는데, 나는 조용히 좀 하라는 쪽지를 얼마나 받았는지 모른다.


나는 그날도 항의 쪽지를 받고 생각했다. '나름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 다니려고 지난주에는 예쁜 덧신도 새로 샀는데. 아무래도 더 천천히 걸어 다녀야 하나 보다.'




매일 아침 독서실 자리에 앉으면서부터 저녁에 집에 갈 때까지의 공부 시간을 타이머로 측정했다.


아침 9시에 자리에 앉아서 밥 먹는 시간과 중간에 쉬는 시간을 빼고 정확히 재보면 8시간도 채우기 힘들 때가 많았다. '이래서 근로시간도 8시간인가 보다.' 라고 생각해보았다.


그때는 인생에 미지수인 항목이 너무나 많았다. 정해져있지 않은 인생을 상상하는 것은 모두 내 몫이었다. 그래서 그 무렵의 나는 언제쯤 소득세라는 걸 내 볼 수는 있을까 하고 매일 궁금해했다.


내가 다녔던 그 독서실에는 토목인 5명이 함께 다니고 있었다. 공기업을 준비하는 우리 학과의 선배 2명, 공무원을 준비하는 선배 1명, 나와 친구.


독서실에는 반찬이나 간식 등을 넣어놓을 수 있는 냉장고가 있었는데, 분실이나 착오로 인한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각자의 쇼핑백에 반찬통을 넣어 밀봉하거나 이름을 적어두었다. 우리는 그날의 밥을 싸 오거나 햇반을 돌려 반찬과 함께 먹었다.


꼭 먹고 싶은 특식이 있어서 외식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우리는 거의 식사를 휴게실에서 해결하고 간단한 믹스커피 타임을 가진 후 양치를 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자리로 돌아가면 혼자만의 시간과 혼자만의 싸움을 견뎌야 하는 게 너무 두렵고 무서워서 자꾸 자리로 돌아가는 시간을 미루기도 했다. 수다를 떨면서 으쌰 으쌰 서로에게 응원의 에너지를 주고받다 보면 내가 정말 조만간 합격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착각도 들었으니까. 시끄러운 응원없는 조용한 독서실 자리는 참 외롭기도 했으니까. 다시 책과의 1:1 씨름을 해야 한다는 게 너무 무서웠던 것도 같다.


그렇게 시간을 끌고 끌다 보면 우리 중 가장 마음이 급하고 열의가 넘치는 선배가 벌떡 일어났다. 남은 우리는 못 이기는 척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부 중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었다.


친구 S와 나는 일주일 중 3번은 코인 노래방에 갔다. 한이 어린 빅마마의 노래를 부르거나 소찬휘의 노래를 부르며 우리의 스트레스를 날렸고, 노래를 마치면 바로 앞에 있는 총 쏘는 게임을 했다.


총 쏘는 게임은 각자의 발판을 밟으면 게임의 주인공이 일어나서 총을 쏠 수 있게 되고 발판에서 발을 떼면 다시 아래에 몸을 숙이고 상대의 총을 피하게 되는데, 나는 오른쪽 발을 발판 위에 올려놓은 채로 발판을 눌렀다가 발을 떼었다가 현란한 발놀림을 뽐내곤 했다. 이어서는 오른손으로는 총을 잡고 왼손 집게손가락으로는 총의 방아쇠에 손을 넣어 연발을 날리는데 그 순간은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2판을 하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 날이 있다. 그날은 독서실에서 조금 더 떨어져 있는 실내야구장에 가서 한판에 1,000원씩 하는 거금을 들여서 야구공을 때린다.


다만, 야구공도 내 마음처럼 잘 맞지 않는 날이면 독서실로 돌아와서 뒤꿈치를 들고 걸어야 하는 게 더 속이 상하고는 했다.




독서실에 등록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마주했던 생경한 독서실의 긴장되는 분위기가 기억난다.


그 무렵부터 나는 쪽지를 몇 개 받기 시작했다. "서랍 조용히 닫아주세요." "죄송하지만, 조용히 걸어 다녀주세요." "계산기 소리 시끄러워요" 등이었다.


전공과목을 공부하고 있던 나는 단순 계산 시간을 줄이려고 뚱뚱한 공학용 계산기를 사용했는데, 토독토독 계산기 소리가 거슬렸던 모양이다.


"계산기 소리 때문에 민원이 들어왔어요. 선배." 하니 공무원을 준비하는 오빠가 그 밑에 티슈를 깔아보라고 했다.


두꺼운 공학용 계산기는 숫자나 기호가 적힌 판을 따로 빼서 돌려 양면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는데, 계산기의 판을 떼니 정말 뒤에 티슈를 깔아도 될 것 같았다. 미용 티슈 한 장은 두껍고 그 한 장을 떼어보면 얇은 2장이 나오는데 그중 1장을 예쁘게 잘라 그 밑에 깔고 계산기 판을 다시 덮었다.


"이 소리가 뭐 그렇게 거슬리는 소리라는 거지."하고 입을 뚱하니 나와 있었지만 모두 예민한 시기니 별수 없지 싶었다.




평소에는 바깥일에 무심한 듯 무표정이었던 독서실 사람들도 다양한 표정을 내보이는 날이 있었다. 그날은 여러 명이 울었고 여러 명이 웃었다.


그다음 날이나 다음다음 날에는 가벼운 차림과 가벼운 발걸음으로 느지막한 오후에 독서실에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엉덩이가 가벼운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곧이어 작거나 큰 짐들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신속하게 나르고 이곳을 떠났다.


별로 감흥이 없었던 그해가 지나고, 그다음 해가 되어서 다시 독서실에 남게 된 나는 또 다른 엉덩이 가벼운 사람들이 생겨나자 혼잣말을 했다. "부럽다."


그렇게 독서실을 떠나는 사람들과 남아서 자리를 지켜야 하는 사람들은 계절에 따라 아래의 물이 위로, 위의 물이 아래로 내려오듯 다른 누군가가 다시 그 자리를 채운다.


공대여자 : 새로 온 내 뒷자리 여자. 시끄럽고 산만하지 않아?
친구 : 아 그래? 내가 노래 듣고 있어서 그런가? 잘 모르겠어.
공대여자 : 자꾸 신경 쓰이고 흐름이 끊겨. 쪽지 날려야겠어.




쪽지 폭탄을 보내는 예민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타이머로 재는 공부 시간이 10시간을 채우기 시작할 때쯤부터 하루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자꾸만 조바심이 들기 시작했다.


점심, 저녁 식사를 마치고 오락실에 가거나 산책하는 시간은 조금씩 줄었고 친구와 이야기하며 웃는 시간도 줄었다.


나는 언제쯤 신나게 독서실 자리를 정리하고 공부하던 책을 버리고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영원히 웃지 못하는 사람이 될까 봐 너무 두려웠다.


취업만 시켜주면, 제발 붙여주면 새벽 몇 시까지고 불평불만 없이 일할 수 있을 텐데. 기부도 많이 하고 착한 일도 많이 하면서 사회에 공헌하면서 살겠노라고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


원서 하나를 쓸 때마다 독서실에서 짐을 싸서 나가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서류를 통과하고 전공 시험을 보게 되고 면접을 하러 가게 되면 나의 상상은 점점 더 현실에 가까워지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부디 제발 이 상상이 현실이 되길 기도하면서 공채 전형에 임한다.


내가 바로 그 다음 차례로 합격하여 이곳을 떠나는 자가 될 수 있을지, 아니면 남는 자가 될 것인지 그도 아니면 포기하는 자가 될 것인지. 확실한 게 하나 없었던 그때의 기분은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가는 기분' 같았다.


나는 언제쯤 이 어두운 터널의 끝에 도착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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