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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된 사람 Mar 19. 2022

오글거리지만 괜찮아!

내 삶의 눈으로 보는 논어 읽기

겨우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더니, 감사하게도 이번 주는 비가 오래도록 내린다. 비록 올해는 농사를 쉬고 있지만, 겨울 가뭄으로 올해 농사가 어렵지는 않을지 걱정이 크던 터라 비님(!)이 얼마나 반가운지!


내가 사는 지역은 과수 농사를 주로 하기 때문에, 겨울이라 특별히 농한기는 아니다. 좋은 과일을 맺도록 가지를 정돈하고 방향을 잡아주는 전정작업이 겨우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본격적인 봄철보다는 여유가 있는 편이라 논어를 함께 읽는 동네 회원들의 개인 공부시간을 내기에 부담이 덜했다.


바야흐로 꽃피는 봄!

바빠지기 시작한 회원들이 어디에서든 어느 때든 논어를 들을 수 있다면 공부 흐름을 이어갈 수 있겠다 싶어 유튜브 영상을 제작했다! 1달에 1번 만나는 빠듯한 모임도 대신하고, 식당의 자투리 시간도 알차게 보낼 겸 무턱대고 시작했다.




다시 읽은 논어는 새로웠다.

한자를 따라 그리기 바빴던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소리 내어 읽고 다른 사람에게 (어설프지만;;) 설명을 하니 어랏-이런 표현이 있었구나 하며 이해되는 정도가 조금 성장했다. '내 삶 속으로 논어를 가져오는 것'은 평범한 하루를 새로운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일상 대화에서 생활의 범주를 벗어난 소재를 꺼내자면 참 오글거린다. 그러다 보면 좁은 대화의 범위로 관계의 폭과 깊이도 한정지어진다. 영상으로 만들어 불특정 다수(열악한 구독자수와 조회수라서 '다수'라 붙이기에는 민망하지만)와 나의 삶에 적용한 논어 읽기를 공유하는 것은 느슨한 감정에 모처럼 기분 좋은 긴장을 만든다. 일상의 삶 속에 약간 정도 새로운 것, 적당히 낯선 시각은 생기를 더한다.



덕으로 정치를 한다는 것은


논어 20편 중 1편인 학이편을 끝내고, 오늘은 2편 위정편의 1장에서 4장까지 업로드했다. 위정편의 첫 장은 정치란, 무엇인가를 북극성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子曰 爲政之德 譬如北辰 居其所而衆星 共之
(자왈 위정지덕 비여북신 거기소이중성 공지)
공자가 말했다.
덕으로서 정치를 한다는 것은 마치 북극성이 자리를 잡고 있으면 뭇별들이 그것을 따르는 것과 같다.

-위정편 1장


덕으로 정치를 편다는 것을 경험해본 적이 없어 나는 선뜻 어떤 장면지 떠오르지 않았다.

선거에서 당선인들이 덕으로 정치를 펼쳐 득표한 것이라고 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또는 인기와 덕이 일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선한 영향력'이 더욱 이해하기 쉽겠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아마 내가 챙기고 보살피는 범위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확장되어 있다는 것이라 본다. 내 한 몸, 내 가족만을 돌보기도 벅찬 세상에서 자신의 이득과 전혀 상관없는 자들의 생사에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고 이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 그러한 그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 행위에 함께 하는 것이다. 마치 북극성 주변에 뭇별이 따르는 것처럼 말이다.


당신의 북극성은 무엇인가요?


시대가 가혹할수록 곳곳에 북극성이라는 자들이 나타난다. 현란한 빛으로 주변의 모든 빛을 가려 급기야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없도록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눈먼 별들이 모여들어 아직 정착하지 못한 별들의 조심성을 무장해제시킨다. '저기 사람들이 많으니 믿을만해' 라는 대중에 기댄 믿음으로 최후의 의심을 버리고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공자 당시에는 치자/피치자가 구분된 사회였으니 위정지덕이 치자의 요건이었다면, 평등사회인 지금의 위정지덕은 누구의 덕목이어야 하는 것일까? <논어_사람을 사랑하는 기술> 이남곡 선생의 말처럼, 이제는 저마다 각자의 과제인 것이다.




내가 나를 덕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북극성을 '나'라는 사람이 요구받는 여러 역할과 내 안의 충돌하는 가치들을 조율하는 중심이 되는 '나의 준거'로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내 안의 북극성을 배치하는 것 혹은 찾는 것은 실존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자기 삶의 중심 없다면 타인과의 공전은 불가능하다. 중심이 약해 타인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면 충돌하거나 큰 쪽으로 흡수되고, 중심이 강해 너무 멀어지면 외골수가 된다.

 

내 안의 북극성이 중심을 튼튼하게 만들어 가게 하는 것이 나이들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려서 선명하기만 하던 가치들이 오히려 해를 더할수록 빛을 잃어가는 것 같다. 경험이 쌓이는 만큼 헷갈리는 것들이 늘어나서 그럴지도.

결국, 자기 방어를 위해 우리는 무엇이 더 소중한 가치인지, 어는 것이 참인지를 알고자 하는 탐색마저 멈추어 버린다.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추종하지는 않다고 스스로 여기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무리의 의견을 내 뜻으로 자신을 속이기도 한다. 어떤 때는 무리에 완벽히 동화되어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선동하는 자리에 서기도 한다.


내 안의 나침반을 스스로 고장내버린 개인의 비극은 곧 사회의 불행이 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만, 그 숫자는 숫자만큼의 편견을 동반한다. 편견은 떨림을 멈춘 나침반처럼 가치와 철학에 스스로의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내 삶을 위한 공부-귀찮고 피곤하고 오글거리고 돈 안 되는 일. 나를 나로서 빛나게 하려면 건너뛸 수 없는 과정. 배부른 소리 같지만, 진짜 배고픔을 해결하려는 몸부림.


생계와 사유은 본래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이 둘을 떨어뜨려 왜곡함으로써 이득을 얻는 자들이 있을 뿐이다. 삶의 태도로서 공부는 세끼를 먹는 것처럼 때로는 가볍고, 일상적으로 잠깐의 틈을 내는 것이다.

배우고 느낀 것을 표현할 때 오는 오글거림이야 반복하다 보면 금세 익숙해진다.


내 삶을 아무 데에나 그저 내어주어 치르는 대가보다는 약간의 수고와 민망함훨씬 가볍다. 그러니 오글거림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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