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내 취향에 잘 맞았고, 남은 이야기가 줄어드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읽었다. 인생의 고통만 집중해서 다루고, 매력적인 요소가 너무 없는 캐릭터가 나오면 읽는 것이 좀 괴롭다. 반면에 과도하게 매력적인 캐릭터를 내세우고 행복에 집중해서 그린다면, 현실적이지 못하고 소망을 충족시키는 이야기라 느끼게 된다. 그런 면에서 <섬에 있는 서점>은 밸런스가 좋은 것 같다. 인간의 삶에 있는 행복과 고통을 적당히 다루어 주었고, 캐릭터에 매력과 결점이 적당하게 섞여 있다.
또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공감하게 해주고 웃겨주는 지점이 많이 있다.
"어밀리아의 어머니는, 소설 따위를 읽으니까 현실의 남자가 눈에 안 차는 거라고 곧잘 이야기했다. 그런 논평은 어밀리아에 대한 모욕인데, 왜냐면 전형적인 로맨틱한 남자주인공이 등장하는 책만 읽는다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로맨틱한 남주가 나오는 소설도 나쁘진 않지만, 어밀리아의 독서 취향은 그보다는 훨씬 범위가 넓고 다양하다. 게다가 그녀가 비록 험버트 험버트를 캐릭터로서 애정하긴 해도 평생의 반려자로서나 남자친구 혹은 어쩌다 만나는 지인으로라도 마다하게 될 거라는 점은 솔직히 인정한다. 홀든 콜필드와 저 두 신사양반, 로체스터와 다아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롤리타, 호밀밭의 파수꾼, 제인 에어, 오만과 편견을 읽은 여성 독자라면 위 강조한 부분에서 킥킥 웃으며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싫어하는 걸 말하면 어떨까요? 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종말물, 죽은 사람이 화자거나 마술적 리얼리즘을 싫어합니다. 딴에는 기발하답시고 쓴 실험적 기법, 이것저것 번잡하게 사용한 서체, 없어져야할 자리에 있는 삽화 등 괜히 요란 떠는 짓에는 근본적으로 끌리지 않습니다. 홀로코스트나 뭐 그런 전세계적 규모의 심각한 비극에 관한 소설은 다 마뜩잖더군 – 부탁인데 논픽션만 가져와요. 문학적 탐정소설이니 문학적 판타지니 하는 장르 잡탕도 싫습니다. 문학은 문학이고 장르면 장르지, 이종교배가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는 경우는 드물어요. 어린이책, 특히 고아가 나오는 건 질색이고, 우리 서가를 청소년물로 어수선하게 채우는 건 사양하겠습니다.”
"에이제이가 책을 사랑하고 서점을 하고 있긴 하지만, 딱히 작가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후줄근하고 나르시시스트이며 배려나 양식도 없고 대체로 불쾌한 사람들이다."
이런 부분은 내게 드라마를 보듯이 생생하게 상상이 됐는데, 에이제이는 인도계 미국인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내 상상 속에서는 미드 하우스의 까칠한 주인공 닥터 하우스의 비주얼로 나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까탈스럽고, 싫은 것 많고,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캐릭터에 열광하는 편이다.(물론, 현실에서 그런 인간과 별로 어울리고 싶지는 않다.) 마술적 리얼리즘이 싫다니, 작가들은 후줄근한 나르시시스트라니 이런 혜안이 있나.
마지막으로, 이 소설에는 내가 인터넷 커뮤니티 글을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과 비슷한 즐거움이 있었다. 이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등장인물들에게 관심 갖고 살펴보게 되고, 그들과 연결돼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아래 발췌한 것처럼, 혼자가 아닌 것 같은 느낌. 실제로 며칠은 커뮤니티 게시판을 덜 둘러보게 되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 우리는 혼자라서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범작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이 목록에 올려놓은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까? 답은 이렇다. 네 아빠는 거기 나오는 캐릭터들과 연결점이 있어. 그 점이 나한테 의미가 있다. 이 일을 하면 할수록 그게 바로 핵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연결되는 것 말이다, 우리 귀여운 꼬마 너드. 오직 연결되는 것.”
어쩌면 이 소설 역시, 인용한 문구처럼 범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객관적으로 기법이 독창적이고 뛰어난 작품은 아닐 수 있지만, 나는 여기에 나오는 캐릭터들과 연결점이 있어서 좋아하는 것 같다. 책을 좋아하는 너드들이 나온다는 것, 그게 내가 이 소설을 좋아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