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금은 안 되고 연락 두절
닥치는 대로 지원해서 처음으로 얻어걸린 번역 회사가 알고 보니 사기 업체였다. 아르바이트 채용 사이트에서 발견하고 지원한 곳이었는데, 지금까지 십 년 넘게 프리랜스 번역가로 일하면서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돈을 떼어먹힐 뻔했다. 이곳과 거래 이후 지레 겁을 먹고 한동안 번역 회사와는 상종을 하지 않았다.
샘플 테스트를 보는 과정도 계약서를 쓰는 과정도 없었다. 대뜸 연락해서는 당장 내일모레까지 급하게 번역을 하나 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통번역대학원에 다니고 있다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던 내게 테스트도 없이 당장 번역을 맡긴다고 했을 때 진즉에 이상함을 감지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력서를 뿌리고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처음으로 받은 의뢰라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당장 학교 수업도 있고 과제도 많아 여유가 없었지만, 무조건 된다고 하고 일감을 받았다. 그 내용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어느 소규모 업체의 수소 발생기 홍보글로, 프랑스 루르드에 있다는 기적의 샘물을 언급하며 수소수의 효능을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샘물과 수소수가 무슨 관계인지는 아직까지 알 수 없다.
다음 날, 학교에 있는데 그 번역 회사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내일이 아니라 당장 오늘 자정까지 납품해 달라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촉박했던 마감을 더 앞당겨 버리니 황당했다. 이미 깊숙이 발을 들이긴 했지만, 이때라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해야 했다. 하지만 너무 처음이라 다른 비교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원래 그런가 보다 했고, 또 연달아 재촉을 해 대는 통에 정신을 차릴 새가 없었다. 오로지 처음으로 맡은 소중한 일감을 주어진 시간까지 무사히 납품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다. 간밤에 하다 만 번역을 서둘러 마무리해서 자정 직전에 전달했다. 번역을 하는 동안에도 번역 회사에서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번역이 잘 되어 가고 있는지, 확실히 자정까지 될 것 같은지 자꾸만 확인했다. 이때까지도 나는 아무 의심없이 ‘정말 되게 급한가 보다’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며칠 후 또다시 그 번역 회사에서 의뢰가 왔다. 이번에도 일정이 빠듯했다. 40여 쪽의 보안 설비 매뉴얼 문서를 주말 안에 모두 번역해 달라고 했다. 이번에도 놓치기가 괜히 아까웠다. 과제는 대충 해치워 버리고 주말을 온통 그 매뉴얼 번역에 쏟아부었다. 눈으로 본 적이 없는 장치의 구조와 작동 원리를 파악하며 문장과 씨름을 했고, 낯선 용어를 한 땀 한 땀 일본어로 바꿔 나갔다. 지금이야 번역기도 있고 챗GPT도 있지만, 그때는 오로지 하나하나 직접 검색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사히 납품했을 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냈다는 생각에 내심 뿌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두 건에 대한 번역료는 익월인가 익익월에 지급될 거라고 했는데, 정말 푼돈이었다. 하지만 당시 내게는 액수가 중요하지 않았다. 프리랜서로서 직접 일감을 땄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을 안 받아도 된다는 마음가짐은 절대 아니었다. 입금으로 이어져야 비로소 나의 첫 번째 번역이 무사히 끝났다고 할 수 있을 터였다.
그 후로 번역 회사는 아주 잠잠했다. 번역 도중에 자꾸 연락해서 사람을 똥줄 타게 만들더니, 급한 건이든 아니든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의뢰도 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입금하겠다는 날짜에 입금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혹시 다음 달에 입금될지도 몰라 한 달을 더 기다렸다. 역시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리고 이젠 아예 연락도 되지 않았다.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했다. 부랴부랴 ‘번역’, ‘사기’로 검색해 보았다. 알고 보니 나 같은 피해자가 여러 명 있었고, 아예 인터넷 카페에 ‘번역 사기 피해자 모임’까지 있었다.
번역으로 사기를 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진즉에 알았다면 일감을 구했다는 사실에 잔뜩 고무되기 전에 일단 그 업체명과 대표자명으로 검색부터 해 봤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운영되는 악명 높은 회사가 몇 곳 있었다. 번역가에게 일을 시켜 놓고 입금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잠수를 타 버리는 게 그들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그들은 업체명과 대표자명을 바꿔 가며 여러 번역가에게 사기를 쳤는데, 몇몇 이름을 돌려 쓰고 있었다. 피해자들의 사례를 모아 놓고 보면 이름은 달라도 모두 같은 연락처로 수렴되었다. 십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그 이름들이 검색된다! 피해자 모임 카페도 아직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십여 년에 걸쳐 업으로 삼을 만큼 번역 사기로 얻는 이익이 꽤 쏠쏠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