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번역, 길도 문도 없는 세계
통번역대학원을 나오면 뭔가 다를 줄 알았다. 일감을 구할 때 더 쉽게 구해진다든지, 학교 인맥을 통해 일감을 받는다든지. 너무 순진하고 안일한 생각이었다. 역시 인생은 각자도생, 저마다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나는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사회생활의 출발 선상에 서 있었다. 그런데 처지는 그때보다 못했다. 나이는 많은데 사회에서 쌓은 경력과 인맥이 하나도 없었다. 내 전부를 걸고 목표로 삼았던 곳도 결국 하나의 분기점이자 새로운 출발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때만큼 뼈저리게 느낀 적이 없다.
원래 회사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만약을 위해 회사도 살짝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졸업을 하고 나니 역시 프리랜서가 되어야 겠다는 결심이 확고해졌다. 출판 번역가가 되고 싶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번역이라고 하면 뭐니 뭐니 해도 책 번역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왠지 뽀대가 나 보였으니까. 또 출판 번역이라면 절대 기계로 대체되지 않을 것 같았다. 당시 네이버 파파고가 등장하기 전인데도 벌써부터 번역가라는 직업의 전망이 밝지 않았다.
가능하면 문학 번역이 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책 번역, 그것도 문학 번역 일감을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동경하던 출판 번역계에는 길도 없고 문도 없었다. 다소 험난하더라도 길이 있기만 하다면, 다소 비좁더라도 문이 있기만 하다면 시도는 해 볼 텐데, 그런 게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입구가 보이지 않는 세계만을 담장 너머에서 건너다보며 마냥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러 가능성을 시야에 두고 졸업하기 전부터 나름대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2학년 초반, 한 번역 수업에서 번역 일 구하기 미션이 주어졌다. 의무는 아니었다. 일을 구하기 쉽지 않으므로, 사회에 나가기 전부터 어떻게 하면 일감을 딸 수 있을지 미리 한 번 알아보자는 취지였다. 뭘 어떻게 하면 좋다는 뾰족한 조언은 없었다. 선생님도 어떻게 하면 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당연하다. 일감을 따는 데 정해진 방법이 있는 건 아니니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구인 구직 사이트에 들어가서 ‘일본어’, ‘번역’이라는 키워드를 입력했다. 꽤 여러 공고가 떴다. 하나같이 샘플 테스트에 통과하면 일을 주겠다는 곳들이었다. 어디에 있는 어떤 회사인지 모호해서 조금 미심쩍었지만, 그중에는 정말 괜찮은 곳도 있을지 모르니 몇 곳에 이력서를 냈다. 직접 부딪쳐 보지 않으면 어떤지 알 수 없다.
그다음으로 포털 사이트에서 ‘번역 회사’라는 키워드로 검색했다. 역시 꽤 여러 사이트가 떴다. 번역과에 다니면서도 평소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아서 잘 몰랐는데, 우리 주변에는 ‘번역 회사’라는 곳이 제법 많았다. 말 그대로 여러 언어로 된 글이나 영상 등을 다른 언어로 번역해 주는 회사다. 사이트에 일일이 들어가 분위기를 살펴보고 그나마 덜 수상해 보이는 몇 곳에 번역가로 지원했다. 지원 창구가 따로 마련된 곳은 드물고, 대부분 고객용 게시판만 달려 있었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지원 글을 썼다. 게시판이 없으면 메일 주소로 지원했다.
동기들은 대체로 일감 따기 미션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마 나와는 처한 사정과 목표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졸업 후 취업을 하거나 자기 사업을 할 예정이면 굳이 일감을 구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단 한 명, 취업 전에 시험 삼아 일감을 구해 보려고 한 동기도 있었다. 그와는 미션의 진척 상황을 수시로 공유했다. 그도 나처럼 마구잡이로 여기저기 지원하고 있었는데, 몇 곳에서는 샘플 테스트까지 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중 한 곳에서 일감을 받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번역료가 너무 헐값이었다. 얼마 안 되는 그 돈도 몇 군데 트집을 잡혀 깎였다고 했다. 지적받은 개수에 따라 번역료에서 차감하는 시스템이라고 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는 일하고 싶지 않다’라고 푸념했다. 몇 건 납품하더니, 앞으로 프리랜서로 일하면 안 되겠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는 졸업 후 바로 취직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내 선택은 달랐다. 한번 클라이언트를 확보하면 그때부터는 계속 번역가로서의 경력이 쌓일 테고, 그 경력을 바탕으로 점점 더 번역료를 많이 주는 곳으로 옮겨 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번역료를 높이는 데는 긴긴 시간과 수많은 인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예 번역료가 오르지 않을 수 있으며 오히려 낮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오르는 물가와는 완전히 역행하는 곳이 번역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