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까지 각오하다
다른 피해 사례를 보면 피해액이 적게는 몇 만원, 많게는 몇백 만원에 달했다. 몇백 만원에 비하면 내 피해액은 우스운 수준이었지만, 나는 처음으로 번역을 해서 번 돈을 포기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 나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그 돈도 내게는 큰 돈이었다.
단순히 번역가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숙맥 같아서 돈을 떼이는 것이 아니다. 번역료는 원래 바로바로 정산되지 않는다. 납품 후 돈을 받기까지 한 달에서 두 달 가까이 걸릴 때가 많다. 아마 회계 처리상의 편의 때문일 텐데, 비단 번역가뿐만 아니라 여러 업체에서 의뢰를 받아 일하는 프리랜서라면 누구나 한번쯤 겪어 봤을 것이다. 직장에 다닌다고 해도 정해진 월급일이 있다. 나로서는 주기만 한다면 언제 주든 상관없고,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의문인 것은 유독 번역료만 익월이 아니라 익익월, 심지어 간혹 익익익월에 지급되는 경우를 맞닥뜨린다는 점이다.
번역 사기는 돈이 들어오겠거니 철석같이 믿고 기다리는 번역가들의 신뢰를 이용한 것이다. 기다린 끝에 돈을 받지 못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계약서를 쓰는 것일 텐데, 사기 업체에서는 급한 번역이라는 둥 호들갑을 떨어 계약서 단계도 건너뛰어 버린다. 솔직히 당시의 나는 계약서를 써야 하는지도 몰랐다. 예전의 나처럼 경험이 없는 번역가 지망생이면 그들의 타깃이 되기 쉽다.
사기 업체에 계속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유치해지기로 했다. 고소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우리 아버지가 법조계에 계시니 각오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판검사, 변호사는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검찰을 퇴직하고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으로서 법 관련 실무를 도맡아 처리하고 계셨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를 이런 식으로 팔아먹게 될 줄이야, 자괴감이 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말 그 유치한 한마디에 그때껏 잠잠했던 사기 업체에서 바로 답변이 왔다. 법조계 어디냐면서, 자기도 그쪽과 상당히 인연이 깊어서 내 협박이 우습지도 않다는 내용이었다. 말만 그렇게 할 뿐, 꽤 뜨끔한 게 분명했다. 아니라면 계속 감감무소식이다가 그렇게 빨리 답장을 보냈을 리 없었다. 그가 법조계와 인연이 깊을 만도 했다. 번역가들과의 지저분한 소송 싸움에 이리저리 얽혀 관련 기관을 자주 드나들었을 테니까.
정작 아버지는 시큰둥했다. 그까짓 돈 몇 푼 때문에 무슨 고소를 하냐면서, 자신이 대신 줄 테니 그냥 잊어버리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 일로 정말 아버지를 귀찮게 하려니 내키지 않았고, 직접 고소를 하려니 방법을 몰라서 막막했다. 무작정 경찰서에 가서 신고하면 되는 걸까? 그러기도 꺼림칙했다. 살면서 한 번도 경찰서에 갈 일이 없었던 내게 경찰서의 문턱은 너무 높았다. 검색해 보니 먼저 내용 증명서부터 보내야 한다는 조언도 있었다. 하지만 그 또한 내게는 너무 생소한 일이었다.
업무상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는 노동청에 신고하면 된다는 말을 어디선가 얼핏 들은 것이 기억나 고용노동부 홈페이지의 민원 신청 게시판에도 들어가 봤다. 알고 보니 프리랜서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라서 돈을 떼였을 떼 구제를 받을 길이 없었다. 정말 오로지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다. 그래도 너무 분하고 괘씸해서, 말로 해결이 안 된다면 정말 고소를 진행하려고 했다. 이참에 절차를 알아 두면 바로 당장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요긴하게 써먹을 날이 올지 몰랐다.
고소에 앞서 일단 인터넷 카페의 번역 사기 피해자 현황 게시판에 들어가 내 글을 보탰다. 사기 업체명과 대표자명을 공개했다. 그러자 이번에도 업체에서 득달같이 연락을 해 왔다. 명예 훼손 혐의로 고소할 거라고, 무사히 돈을 받고 싶으면 당장 글을 지우라고 닦달했다. 덜컥 겁이 났다. 사기꾼 주제에 평판을 신경 쓰느라 주요 카페를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나는 쫄보였다. 우선 글을 지우고, 이번에야말로 정말 약속한 날에 약속한 금액이 어김없이 들어오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재촉을 해서 결국 돈을 받아 냈다. 상대적으로 낮은 액수라서, 그냥 먹고 떨어지라고 입금해 준 것 같았다. 나보다 더 큰돈을 손해 본 번역가들은 아직 계속 싸우고 있는 듯했고, 나 이후로도 계속 새로운 피해자가 늘어나는 낌새였다. 그들이 어찌 되든 간에 나는 받을 돈을 받았으니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피해자 모임 카페에서 아예 탈퇴해 버렸다.
그때를 제외하면 한 번도 번역료를 제때 받지 못해 마음고생을 한 적이 없다. 어떤 곳에서도 이력서를 보자마자 급한 번역이라면서 덜컥 일을 맡기지 않았고, 일감을 줄 때는 내가 언급하기도 전에 항상 내부 규정과 계약서 얘기를 꺼냈다. 지금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체 왜 쪼잔하게 별 이득도 없을 것 같은 번역으로 사기를 치는 건지. 대체 왜 힘없는 번역가들을 상대로 그런 못난 짓을 벌이는 건지. 10년이 넘도록 사기를 치고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