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만화 번역 1

골프를 만화로 배우다

by 정시체

번역 사기 업체와 한창 엮여 있던 시기에 아르바이트 채용 사이트를 통해 알게 된 회사가 또 있었다. 만화 번역 회사로, 여러 인터넷 만화 플랫폼에 일본 만화를 번역·편집해서 납품하는 업체였다.


이곳이야말로 제대로 된 절차를 거쳐 번역가를 모집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회사였다. 이력서를 낸 뒤 샘플테스트를 거쳤고, 번역에 들어가기 전 계약서도 썼다. 당시에는 전자계약서가 없었기 때문에 무려 우편으로 서류를 주고받았다. 받은 서류 두 통에 사인을 해서 보내면, 상대방도 사인을 해서 한 통은 보관하고 다른 한 통은 다시 발송하는 방식이었다.


거창한 절차에 비해 번역 단가는 정말 낮았다. 인형에 눈알 붙이는 부업이 정말로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있다면 거의 그 수준이 아닐까 싶다. 번역을 하기 위해 힘들게 머리를 굴리느니 차라리 인형에 눈알을 붙이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같은 과 동기들에게 넌지시 만화 번역을 하고 있다고 털어놓으면서 단가도 같이 귀띔해 주었다. 다들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면서 절대 그 돈을 받고는 일하고 싶지 않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나도 처음 단가를 듣고는 놀랐었기 때문에 그들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번역료가 얼마인지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으로서, 어떤 식으로 일감을 받을 수 있으고 어떤 식으로 번역 일이 진행되는지 알고 싶었다. 정말 번역으로 돈을 벌 수 있는지도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때만 해도 그런 낮은 단가의 일에 계속 머물러 있을 리 없고, 시간이 지나 경력이 쌓이면 더 단가가 높은 일로 옮겨 갈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어딘가 다른 곳에는 분명 더 보수가 나은 일이 있을 거라고. 그래서 일단은 번역료가 어떻든 다 경험이려니 여기고 주는 일은 전부 받아 꾸역꾸역 했다. 어쨌거나 번역료는 항상 정해진 날짜에 어김없이 입금되었다. 게다가 업체 대표가 매우 깍듯했다. 당시에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맨 처음 맡은 작품은 총 세 권짜리 골프 만화였다. 소재만 골프고 장르는 드라마인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정통 스포츠 만화였다. 모든 등장인물이 절대 한눈을 팔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골프만 쳤다. 나는 원래 스포츠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더더군다나 골프에는 완전히 문외한이었다. 다른 종목은 적어도 구경할 기회는 있었지만, 골프만큼은 어쩌다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본 적조차 없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골프는 중고등학교 체육 교과서에 나오는 종목도 아니었다. 그래서 골프가 어떤 규칙으로 어떻게 진행되는 스포츠인지 전혀 몰랐다. 딱히 알고 싶었던 적도 없는데, 내 평생 골프를 칠 일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서도 상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화 속 등장인물들을 따라 각종 골프 대회에 참가하면서 골프 규칙을 파악하고 전문 용어를 익혀 나갔다. 등장인물은 모두 청소년이었는데 벌써부터 골프 외길 인생을 걷고 있었다. 한창 친구들과 밖에서 어울려 놀고 게임에 빠져 있을 나이인데도 아이답지 않게 늘 골프 훈련에 전념했다. 다른 또래 선수에 대한 경쟁심을 불태우는 모습은 이미 성인 프로 선수 못지 않게 살벌했다. 구사하는 용어도 범상치 않았고, 경쟁 상대의 경기 상황을 지켜보며 제법 그럴싸한 비평을 늘어놓기도 했다. 나로서는 도무지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아마 한국어로 떠들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용어의 뜻을 파악한다고 끝이 아니었다. 어떤 용어는 늘 쓰이는 수식어와 결합되어 정형화된 형태로만 쓰이기 때문에 실제 골프 업계에서는 어떻게 쓰이는지 따로 조사해야 했다. n번 홀(파4)에서 잘 맞은 티샷이 페어웨이 중앙으로 날아가다가 방향을 틀어 OB구역으로 날아갔다는 둥, 5언더파 67타를 기록해 최종 합계 24언더파 264타로 2위를 4타 차로 따돌리고 우승했다는 둥. 스포츠 신문 기사를 뒤져 대충 어떤 느낌인지 감을 잡고, 그럴싸하게 말을 지어 대사를 쳤다. 풋내 나는 어설픈 표현으로 만화의 전문성을 깎아 먹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차라리 골프 교본이었다면 골프의 기초부터 설명되어 있어 배우면서 번역할 수 있었을 텐데. 만화책에서는 내가 이해하든 말든 저희들끼리 떠드니 참 난감했다. 팔자에도 없는 골프를 울며 겨자먹기로 허겁지겁 익히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세 권을 모두 번역할 때까지 아이들이 쏟아내는 전문 용어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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