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0일 8시.
이 날, 달력 숫자와 공기와 기분까지 정확하게 기억한다.
코로나로 각종 행사들이 취소되던 날들을 지나 전염병이 소강상태에 이르렀을 때
우리 동네에서 처음 오프라인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풀마라톤도 아닌 9km.
모두 기다렸던 오프라인 마라톤이어서 거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조건 참여하는 데 의의를 두는 나만의 의식이었으니까.
내 달리기 역사에 새로운 경험을 추가하고 싶었고 뇌에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마라톤 분위기가 어떤지도 궁금했다.
떨리냐고 주변에서 물어오면 아니라고 태연스럽게 대답했지만 은근 긴장 됐다.
호기로운 겉모습과는 다르게 쉽게 잠들지 못했고 결국 얼굴이 팅팅 부은 채로 행사장에 도착했다.
속한 러닝 크루가 없는 나는 뻘쭘하게 번호표를 받아 들고 주변 사람들을 구경했다.
나만 빼고 다 프로 선수들 같았다.
장기간 달리기로 몸이 다져진 사람들은 군살 없는 러너의 몸을 갖고 있었다.
쭈뼛쭈뼛 사람들을 구경하는 내가 웃기면서도 창피했다.
잠시 ‘순위권 안에 들어볼까?’ 했던 호기로운 마음을 황급히 집어넣었다.
젊은 러닝크루들이 많다고 해도 달리기 내공과 세월이 쌓인 단단한 몸을 가진 중년의 러너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달린 사람들은 말 같았다.
군더더기가 사라지고 근육만 남은 몸이 얼마나 멋져 보이던지.
구릿빛 피부에, 달리는 동안 축적된 햇살, 빗물, 땀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시간을 견뎌온 자연의 모습을 인간으로 형상화한다면 러너의 몸이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내 모습을 보는데 후덕하니 불필요한 게 많아 보인다.
뭉뚝한 연필 끝 같은 얼굴과 몸. 다 걷어내고 단련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공식 행사에서 소속 클럽 없이 참가하는 건 조금 외롭기도 했다.
눈치 보게 되고 군중 속에서 보호막이 없는 기분이다.
그러나 출발 총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모두 고독한 혼자만의 싸움이 시작된다.
마라톤을 위해 특별한 훈련을 한 건 아니지만 매일매일 성실하게 달렸다.
성실함의 힘을 믿으며 러너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천천히 갔다.
출발선에 서서 참가자들 모두 스트레칭과 앞에 사람 어깨를 주물러 주며 몸을 풀었다.
어딘지 상기되고 흥분된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전해지는 그 달뜬 에너지에 나까지 설렜다.
출발음이 크게 들렸고 심장은 미친 듯이 떨렸다. 그렇게 각자의 레이스가 시작됐다.
빠른 사람이 지나가면 괜히 뒤처질까 봐,
원래 페이스를 잊고 과호흡 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하나, 둘, 하나, 둘’ 작은 소리를 내며 입으로 구호를 속삭였다.
3km를 통과했을 때쯤 안정된 심박수로 비로소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흐르는 땀, 뜨거운 태양, 같이 뛰는 사람, 혼자 뛰는 사람. 옆에 흐르는 강. 모든 게 영화 같았다.
물론 나를 지나쳐가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덩달아 초조함도 커졌지만.
드라마나 뉴스에서만 보던 급수대도 있어서 한 모금 마시며 타는 목과 마음을 식혔다.
긴장이 풀렸는지 미친 사람처럼 계속 웃음이 나왔다.
‘내가 여기 왜 있지? 이게 뭔 일이야?’
그때부터는 경쟁과 상관없이 즐기는 마라톤을 했다.
피니쉬 라인을 통과하는데 진행자가 2521! 하면서 내 번호를 불렀다.
강한 해로 얼굴을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해냈다는 안도감과 새로운 감각들 덕분에 전신이 찌릿찌릿했다.
인증제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제 진짜 러너가 된 듯했다.
이날 마라톤은 칩을 제공한 대회가 아니라 공식 기록은 없다.
기록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첫 마라톤 대회였으니까.
간혹 온라인, 오프라인 마라톤을 짧게 참가했지만 당정뜰에 서 있던 그날의 대회만큼
큰 울림을 주지는 않는다. 모든 처음은 어딘가 어설프고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니까.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우리는 각자의 마라톤을 하고 있는 인생 러너들이다.
당연히 누군가는 앞서 갈 것이고 내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도 있을 거다.
감사하게도 가끔은 페이스가 맞아 이야기 나누며 같이 뛰는 동지를 만날 수도 있다.
발이 꼬일 때도 있고 숨이 가빠올 때도 있다. 지금 막 레이스에 참여한 이도 있다.
당장이라도 누워서 쉬고 싶을 만큼 한 발짝 떼기 어려운 구간도 만날 거다.
매 순간 잊지 말자. 어차피 공식 인증 따위는 필요 없는 나의 레이스를
조금 더 웃고 더 두리번거리고 더 넘어지고 더 왁자지껄 같이 하는 이들과 이야기하면서
달려가자고. 유일무이한 러너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