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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강쥐 Nov 16. 2023

프로젝트명: ET

우리 정말 할 수 있을까? 

길고 긴 세월이었다. ET 프로젝트를 만나기까지, 무려 2년이 걸렸다. A가 나에게 ET를 제안하기전까지, 나의 삶을 어떠했는가. 정말 험난하고도, 험난한 세월이었다. 그 세월을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진 않겠다. 다만 누가 들어도 "퇴사를 안하고 버티다니 용하군" 이라고 할 법한 일들을 겪었다고만 해두겠다. 그렇게 스스로도 이쯤이면 됐다. 나가서 새로운 길을 찾자고 마음먹을 때 쯤, A가 내게 말을 걸었다. 


A는 우리 회사에 최근에 합류한 임원으로, 이전까지 대화를 나눠본건 2~3번 정도가 전부였다. 다만 그때마다 매우 차분했고, 논리정연했으며, 굉장히 분석적이었다. 친절하고 상냥하면서도 허튼 소리는 하지 않고, 어디서든 관찰을 하고 있는 인상을 받아서 그를 대할 때마다 은근히 긴장이 되곤했다. 웃으면서 냉정하게 평가할 사람같았다. 그가 회사에 합류한 이후 할 일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엔지니어/설계 쪽 전문가이기에 어차피 나랑 크게 상관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A가 나를 잠깐 불러 화이트보드에 그린 그림은 전혀 다른 구상안이었다.  맨 처음에는 사실 전혀 못 알아들었다. 갑자기 잠깐 두통이 날 정도였다. 내용이 어려운게 아니라, 2년간 대표가 던져서 내려온 그림을 이해하는데만 익숙해진 것이다. 대표는 시장의 수요를 잘 파악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가 던지는 그림들을 다 직관적이었다. 저쪽에 고객님이 있으니, 그가 원하는 000을 만들어와라! 혹은 만들꺼다 라고 말하는 식. 소위말해 이미 수요를 확보하고, 거기에 공급을 하니 틀릴 일도 재고가 남을 일도 없었다. 하지만 이 과정 속에서 대표도 힘에 벅차했고, 회사 입장에서도 슬슬 바로 당장 확보된 고객이 아닌 조금 멀리있는 고객을 향해 던지는 그림이 필요해지고 있었다. 즉 '가능성'이 있는 시장에 던질 우리의 '가능성'을 보여줄 때였다. 


분석가인 A인 한 달만에 회사의 현재 상황 분석부터, 회사가 속한 시장 상황 분석,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능성까지 모두 파악해왔다. 그에게 이런건 어디서 배웠냐고 물었더니, 그냥 원래 아는 거라고 했다. 이럴 수가 전혀 재수없지가 않았다. 진짜 타고난 것 같았다. 그는 나에게 이 프로젝트가 어떻게 보이냐고 물었고, 나는 처음들어본 내용이라 딱히 말씀드릴 수가 없다고 말하며 그 구상에 ET프로젝트로 이름을 붙여드렸다. 일단 이름을 붙여야 내게로 오는 법이니까. 난 그에게 VC로 빙의가 되어 현재 고객은 있는지, 유사 서비스가 얼마나 있는지, 우리가 잘할 수 있는 분야인지 등을 질문했다. 그는 다 만들어가야한다고 했다. 


학습효과가 있는 나는 바로 의심을 했다. 왜, 이것을 나에게 말하는 것인가. 바로 아래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3번이 가장 유력했다. 회사 자체가 소규모라 실제 인원이 많지도 않은데다, 현재 회사 상황에서 회사를 이해하면서도 그에게 미친듯한 크리틱을 하지 않을 사람을 후보에 놓는다면 몇 명없긴했다. > 실제 확인해보니 이 이유였다 (욜! 학습효과)


1) 나의 지적 능력 테스트 -> 그렇게 한가한 사람은 아니며 이미 파악했을 듯

2)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서 답답해서 > 들어줄 사람 많음 

3) 테스터 > 일단 여러 이야기를 모아본다 


이날 많은 생각을 했다. 일단 그 이전에 나라면 박수 10번은 쳤을꺼다. 구상안과 그림을 주다니, 그것자체로 너무 멋있는데 이미 분석까지 했단 말야! ? 하지만 이젠 무서웠다. 대표에게서 나온 그림이 아닌데 이걸 던져야 한다고? 개까이겟는데 ? 시장은 준비됐나? 될 만한 프로젝트일까? 잠깐 근데 내가 기여할 수 있는게 있긴한가? 하..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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