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나는 퇴근 후 합정으로 항돌이를 만나러 갔다. 주로 남쪽에 거주하는 친구네 강아지가 서올로 올라와있기 때문이다. 항돌이는 8개월 차 보더콜리다.
항돌이는 보더콜리답게 힘이 넘쳤다. 하루에 3번은 산책을 시켜줘야 이 에너지를 감당할 수 있다고 했다. 항돌이는 보폭이 크고 빨리 달리는 것을 좋아했고, 이곳저곳 냄새를 맡는 것도 좋아했다. 공놀이에는 환장했다.
목줄을 잡아주는 상태에서 같이 뛰기를 1시간. 이미 갤럭시는 오늘 11km를 걸었다고 알려줬다.
결국 J와 잔디밭에 주저앉아 공 던져주기를 무한반복하며 근황을 나눴다.
항돌이는 아직 개보단 사람을 좋아해서 다른 강아지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는데 괜히 속상했다. 엄마 아빠가 참관수업에 참여해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자식을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러다 조그만 강아지에게라도 먼저 다가가서 서로 코를 킁킁대고 있는 것을 보면 또 괜히 행복했다.
평소라면 무조건 구석진 자리에 기대고 앉는 것이 카페를 가는 이유라고 생각한 내가, 항돌이와 함께 있기 위해 카페밖에 앉았다. 아마 항돌이가 더 놀고 싶어 했다면 카페도 포기해줬을 거다.
보더콜리는 양치기 개였기에 움직이는 것을 보면 쫓아가는 습성이 남아있다고 했다. 그래서 특히 자동차 바퀴가 굴러가는 것을 보고 달려든다는 이야기를 들어 차도를 걸을 때마다 긴장했다. 털 빠짐도 많았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세상에나 태어나서 처음 본 강아지에게 이렇게 맞춰줄 수 있다니. 새삼 그동안 사람을 대해왔던 내 태도를 반성했다.
항돌이에게 맞춰 산책을 하는 것이 나의 힐링이었다. 친구들에게 한참 항돌이를 자랑하다 문득 느꼈다. 나도 강아지를 책임지는 인생을 살고 싶다고.
나는 강아지를 사랑한다. 그동안 책임지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지는 않았는데 오늘은 그랬다. 강아지를 위해 내 월급과 시간을 붓는 것은 물론 더 나은 조건의 환경에서 살게 하기 위해 사회운동도 할 생각이 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직감했다. 그동안 내 사랑 태도는 아주 단단히 잘못됐었구나. 상대방에게 맞춰가는 것이 내 행복이어야 했다. 맞춰주는 것을 알아달라고 투덜거리거나, 그 대가를 바라는 건 의미가 없었다. 일종의 사랑이라는 단어를 빙자한 폭력이었다.
사랑 아래서는 '책임'이라는 단어도 내가 누군가를 종속해 컨트롤하겠다가 아니라 그 대상이 더 행복해질 수 있게 나를 기꺼이 희생'하는 과정에서 내가 성장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런 과정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돼야 했다. 그동안 내게 사랑하는 관계에 있어 책임이라는 단어는 가부장제 구조속에서 한 명의 경제활동에 의존해 산다는 것만을 뜻해왔다는 것을 고백한다. 여전히 연애 시장과 결혼시장에서는 이 의미로 쓰이는 것 같지만.
아마 강아지를 키우기 위해 지금 내가 이 회사를 더 다녀야 하고 지출을 줄여야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것 같다. 그런데.. 과연 그동안 내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태도들이 이랬었나? 부끄럽지만 전혀 아니었다.
나는 그동안 '사랑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했었을까. 그동안은 아마 '너는 내 거라는 소유' ' 나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욕구'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언어적 신호' '너와 계속 놀고 싶다는 의미' 정도였던 것 같다. 물론 좋아하는 감정을 표현한 것은 맞지만 상대방을 위해 내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책임의식은 부재했다.
역시 이래서 인생에는 사랑이 필요한가 보다. 오늘 점심 커피 시간에 선배들이 내게 소개팅 안 하냐고 물었다. '사랑 그런 거 잘 모르겠는데요 '라고 속으로만 생각했었는데(밖으로 말할 만큼 사회성이 없지는 않다) 그로부터 11시간 뒤인 지금은 다시 사랑 예찬론자가 됐다. 그날 저녁에 가질 감정도 예측하지 못하는 인간 삶이라니.
이제 나는 앞으로 기꺼이 책임지고 싶거나,, 책임을 져볼까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드는 상대에게만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기로 했다. 나..이번생에 가능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