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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현정 Mar 22. 2019

만년필- 4회

소유할 수 없는 욕망

아버지의 흔적을 정리하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냉장고에서 나온 먹을 만한 것들로 소주가 유일했는데, 총 7병은 장례식장에 오신 동료 분들께로 갔다. 남은 옷가지들과 자질구레한 소품들은 100리터짜리 재활용 봉투 한 장에 모두 담겨 한 번에 처리되었다. 옷장과 작은 침대, 세탁기, 냉장고 등의 큰살림은 한꺼번에 모두 꺼내 버려주는데 50만 원이 든다고 하였다. 이 비용 역시 건설사에서 대주었다. 상진은 예상치 못한 또 한 번의 호의에 연신 고개를 숙이며 절을 했다. 공간이 넓었더라면 큰절을 했을 것이다. 건설사 측 사람이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50만 원을 세어 상진에게 주었을 때 건설노동자들은 아직 봉투에 5만 원권이 50장 이상 남아있는 것을 흘깃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진에게 온전히 이 위로금이 전해졌더라면 조만간 그에게 닥칠 불행을 막고도 남을 금액이었다.


나흘이 지난 후 상진은 서둘러서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 나흘간 그는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매일 그리던 버릇 때문에 자기 전에 손이 저절로 꿈틀댔는데 더 이상 이 욕구를 스스로 막을 힘이 없었다. 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소중하게 바지 주머니에 뉘어있는 만년필을 꺼내 쥐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즈에 딱 맞는 그립감과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고 있으니 상진은 숨통이 트이는 홀가분함을 느꼈다. 그로부터 3일간 꼬박 그는 그림만 그렸다.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없으니 화장실도 갈 필요가 없었다. 방안의 전기등을 켜 둔 채로 3일이 지나는 바람에 그는 해와 달이 바뀌어 있는 시간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만년필 끝에 퍼붓고 잉크가 고갈된 때 그는 그림을 멈추었다. 그때 그가 만난 세상은 너무나 고요하여 적막하기까지 했다. 그는 밤이 늦었음을 깨닫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그다음 날 그리고 그다음 날까지 그리고 그다음 날까지 연신 며칠 잠을 자고 일어난 성진은 문득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배가 심하게 고팠고 집세를 낼 월말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채비를 하고 여느 때처럼 시간에 맞추어 일터에 갔다.


“상진 씨, 아 참네. 연락이 안 되가지고...”


“매니저님 안녕하세요.”


“아 저기. 상진 씨가 열흘이 넘게 안나오고 연락도 안돼서 아르바이트생을 새로 뽑았지모야. 그러게 왜 핸드폰은 없어갖고.”


(열흘이 넘었던가.)


그는 진열장에 열심히 과자를 세팅하고 있는 젊고 통통한 청년을 자기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았다.


“아. 열흘이 넘어서... 그러셨군요. 죄송합니다.... 집세를.... 아... 알겠습니다.”


“미안하게 됐어. 얼굴이 많이 상했네. 가서 좀 쉬어야겠네. 이제까지 상진 씨가 여기 오래 일해서 어지간하면 혼자 버텨보려고 했는데 좀 그렇게 됐어.”


“네... 안녕히 계세요...”


그는 근처의 편의점을 돌며 알바를 구하지 않는지 물어보고 다녔다. 만약 상진이 거울을 볼 수 있었다면 그날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며칠간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아 길게 늘어진 그의 눈은 각도가 더 심하게 기울어졌으며 볼에 붙은 살이라곤 없었다. 큰 키는 더욱 부각이 되어 걷는 모습조차 위태롭게 보여 흡사 종이인형이 나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그의 손만은 여전히 크고 단단하였으며 그의 몸속 모든 영양분을 끝까지 쥐고 있는 최후의 보루였다. 인근의 편의점 주인들은 물론 아르바이트생을 구할 일도 없을뿐더러 설령 아르바이트생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상진을 보고 호감을 갖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수상한 사람으로 신고하려고 했던 편의점 주인은 셋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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