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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현정 Jan 03. 2020

December

당신의 12월은 어떠십니까?

보통은 12월이 되면 올 한 해가 벌써 지나가네, 나이가 어쩌네, 한 해 동안 한 게 아무것도 없네 하며 연신 똑같은 말을 뿜어내는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해가 지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봐야지 하는 핑계지만 그냥 술 마시는 게 좋았던 것 같다. 특히 코가 찡하도록 추운 겨울 불빛이 어스름한 너무 반듯하지 않은 술집에 들어가 따뜻한 정종을 마시며 그래도 이 정도 오래 살았다고 지나간 옛 추억을 더듬는 일, 그냥 그것이 좋아서였다. 비슷한 대화 후 마지막 코스로 노래방에서 음주가무를 즐기고 나면 다음날 혹은 그다음 날까지 숙취로 방바닥에 기대어 산다. 그렇게 집에서 간을 쉬게 할 때면 주로 참회의 시간을 갖는다. 노래방에서의 기억이 반쯤 남아 있는 경우가 특히 그런데 어떤 노래가 나오자 앞으로 뛰어나가 춤을 추었던 것, 음정 낮추지 않고 불렀던 그 명곡의 하이라이트에 소리를 지르다 그만 삑사리가 났던 것, 옆 자리 사람에게 불쑥 이런저런 충고를 했는데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자 어느새 옆자리 사람이 바뀌어 있던 것 외 누워있으면 떠오르는 기억들로 이불 킥을 수차례 하게 된다. 그러다 지쳐 잠이 들고 어느 정도 나의 간과 멘털이 회복될 무렵 상대방만 바뀐 채 유난스러운 송년회는  바뀐 채 또다시 반복되었다.


 이런 류의 12월과는 조금 달랐던 2006년 연말이었다. 마케팅부서로 옮기고 1년 반을 간신히 버틴 후 뭐가 그리 당당했는지 사직서를 냈다. 나는 아주 어렸고 간절했기 때문에 매일같이 계속되는 야근과 주말 업무 정도는 기쁜 마음으로 할 자세까지 갖추었지만 상사로부터 받은 불신감을 극복하기 힘들었던 유약한 청춘이었다. 하지만 영민하게 그런 나의 상태를 간파한 상무님이 상사를 바꾸어 줌으로써 마케터로서의 생명이 조금 연장되었다. 그렇게 하늘이 두 쪽 날 것 같았던 사직서 제출 사건이 있었던 그 해 연말에 남편과 함께 일출을 보러 동해로 향했다. 매일 뜨고 지는 태양이 12월 31일이라고 해서 더 크고 선명한 것은 아니었다. 2007년 1월 1일 동해에서 처음 만난 해는 안개에 휩싸여 언제 떠올랐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일출을 봤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할지 애매한 상태로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길은 험난했다. 정동에서 강릉 IC까지 7시간이 걸렸고 거진 11시간이 걸려 집에 도착했는데 그 이후로 아직까지 연말에 일출을 보러 동해에 간 적은 없다. 다행히 자기 개발서 한 권을 들고 갔기에 차 안에서 읽을 수 있었는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주제의 마치 운동을 열심히 하면 건강해질 수 있다는 부류의 것이었다. 아침에 30분 일찍 일어나서 명상으로 하고 책을 읽고 하루의 계획을 세우고... 하나도 새로울 게 없는 그런 내용. 하지만 동해의 새해를 활짝 여는 기운이 미쳤던 걸까 그 책을 읽는 동안 뭔가 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기분이 들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은 책의 저자가 내 귀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약간의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마케터로서의 눈부신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거야.’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부풀고 밝은 우주의 좋은 기운이 들어와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는 기분이었다. 자기 개발서 한 권으로 새 인생을 다짐하면서 두 손을 불끈 쥐었던 2006년의 12월은 그렇게 결자해지를 하며 저물었다.


<탁월한 인생을 만드는 법>이라는 책을 주문했다. 그 흔한 페이스북 광고를 보고 덜컥 주문을 했다. 퇴사 이후에 처음으로 구매하는 자기 개발서였다. 이제는 회사라는 울타리도 괴롭히는 직장 상사도 이를 영민하게 알아차리고 조치를 취해주는 그 위의 상사도 없다. 엉성하지만 내가 손수 만든 핸드메이드 울타리를 적당히 두른다. 그간의 시행착오를 통해 갈고닦은 사람 보는 안목을 최대한 살려 적당히 가깝고 적당히 먼 거리로 사람을 사귄다. 덕분에 사람으로 인한 없지만 사람에 울고 웃고 하던 감정의 진동폭은 대폭 줄었다. 어느덧 매해 인생 2막이라는 표어를 내걸어 놓고 이제는 더 이상 누구도 뭘 하라고 시키지도, 간섭하지 않는 그야말로 천국 같은 곳에 있지만 <탁월한 인생을 만드는 법>이 궁금한 이유는 울타리 안에서는 그것을 찾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빗장을 풀고 삶에 뛰어드세요.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사귀고 무모해 보여도 많은 도전을 해보세요.

 이제 와서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건가. 그래서인지 2019년 현재 해결해야 할 문제도 어떤 프로젝트를 이루어낸 것에 대한 기쁨도 딱히 없이 그저 모든 것이 순조롭고 밋밋한 느낌이다. <탁월한 인생을 만드는 법>을 읽은 후 오래간만에 얻은 우주의 기운을 통해 핸드메이드 울타리를 스스로 열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2019년 12월에는 여느 때와 같은 송년회 모임이 계속되겠지만 술 마시는 것보다는 걷어버린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맞이해 보려 한다. 탁월하지는 못해도 더 괜찮은 인생을 만들 수는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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