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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룽지

by 세연 Feb 19. 2025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저 눈부시고 황홀한 햇살이 가득한 아침이다. 이중으로 된 창을 거쳐 들어오는 햇살에 안경은 벌써 변색되어 푸르뎅뎅하다. 덕분에 집안에는 별다른 난방 없이도 훈훈하고 밝아서 참 좋다. 오후 한 시를 기다리는 것인데 시간이 더디 가고 있다. 시간은 상황에 따라서 제 마음대로다. 외출 시간을 기다리는 시간엔 이리도 더디지만 여유롭게 즐기고 싶을 때는 자각을 하기도 전에 벌써 어둑해지곤 한다. 그러나 뭐 어쩔 것인가? 시간이야 제 심술대로 두고 그 안에서 실속을 차려보자.     

  누룽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12월도 다 차고 연말이 며칠이나 남았나? 아직도 맛보지 못한 햅쌀밥(이미 그 이름은 퇴색되어 버린)을 먹고 싶은데 아직도 묵은쌀이 한 통 가득 비워지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가 집에서 요양 중이실 때는 고소하게 드실 누룽지를 만들어 드리면 좋아하셨었다. 어떻게 고소하게 잘도 만들었다는 칭찬도 하시면서. 그러나 사실 누룽지는 그다지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밥을 물과 섞어서 얇게 펴고 꺼질 듯 말 듯 불로 시간을 맞추면 완성된다. 자칫 깜빡해 버리면 새까맣게 타버리지만, 누룽지를 할 때만큼은 건망증도 잠시 양보해 주곤 했었다.     

 어머니의 식사를 병원에서 대신 챙겨드린 후로 누룽지 만드는 것을 잊고 살았다. 지금은 특별히 좋아하시는 것도 맛있는 것도 가리지 않고 다만 눈앞에 놓인 음식을 먹는 것으로 식사를 마치신다. 잘 먹고 잘 마시는 것이 삶의 위로가 되고 목표가 될 때도 있지만 그것들이 무의미 해 질 때쯤은 삶의 의욕도 사라지는 것 같다. 아직은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많은 나는 또 내 욕구를 충족시켜 보고자 시간을 쪼갠다. 어머니의 무탈한 시간을 틈내 잠깐 바깥바람을 쐬어볼까 싶다.     

 나라 사정이 하 어수선해서 뉴스만 켜면 분노가 치밀지만 잠깐 내려놓는 것이 내 안녕에 이롭겠다 싶다. 사람의 야망과 욕심의 끝은 어디까지일까? 머리도 그 언저리에서 콩고물이라도 뒤집어쓰고 싶은 조무래기도 추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이들은 이승에서 어떤 벌도 받지 않는다. 저승은 가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자신들을 꾸짖으려 하는 무리를 가소롭게 째려보고 비웃는 마음은 죽음 앞에서는 후회가 되려나? 밥이 팬 바닥에서 모양을 바꾸어 누룽지가 되는 것처럼 저들의 고약한 심성도 바꿀 수 있는 장치는 없을까?      

 여행 중 호텔 조식은 왜 그렇게 비싼 것인지 모르겠다. 그다지 특별하게 먹을 것도 없이 빵이나 샐러드 과일 정도 먹는데 부담해야 할 가격이 너무 비싸다. 경영자의 입장과 이용자의 입장이 서로 다른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고 굶을 수는 없어서 택한 묘책이 누룽지다. 포트에 끓여서 가벼운 김에 곁들이면 아침 식사로는 충분하다.      

 누룽지를 만들려는 밥이 익어가는 냄새가 누룽지로 만들어버리기엔 좀 미안할 정도로 고소하다. 비록 묵은쌀이지만 제맛을 잃지 않았다. 여름을 거치는 동안 냉장고에서 보관한 덕분인 듯하다. 몇 번 반복하면 일주일 식량으로는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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