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과 함께 익어 가는 조청
눈이 펑펑 내리는 집 모퉁이에 큰 파라솔을 펼쳤다. 내리는 눈을 받아 날리는 바람도 만만치 않지만, 그에 못지않게 장작을 감싸고도는 주황 불빛의 맹렬함이 좋았다. 불땀을 바라보다 불이 약해지기 전에 장작을 더 넣어주고, 다시 시작되는 불춤을 바라보면 나는 모든 생각에서 해방이다. 그저 장작이 불을 거절하지 않기를, 마당을 거쳐 좁은 모퉁이를 휘감아 도는 바람이 부디 내 뒤에서 불어주기를 소원할 뿐이다. 맞바람은 불을 토해 내기 십상일 테니. 소망이 통하는 간간이 찬바람에 얼어가는 등도 돌아앉아 굽는 재미 또한 더할 나위 없다.
불을 때는 것과 불장난은 다르다. 재미 삼아서 하는 일을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고 우기면 안 될 일이다. 목적이 분명한 일을 재미 삼아서 해 보았다고 우겨도 제 안에서는 낄낄댈 일이다. 재미 삼아서 했건 목적이 있어서 했건 간에 자신의 언행을 인정하는 것은 소극적이나마 양심이다.
반쯤 삭은 깡통 아궁이에 불을 지핀 것은 잔재미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오늘 불은 조청을 만들 목적으로 시작했다. 조청에 필요한 식혜는 어제 만들어 두었다. 작은 밥솥이지만 6인분씩 세 번을 거듭했더니 양이 만만치 않았다. 엄마가 길러서 주신 엿기름을 섞고 자작하게 물을 넣어 보온으로 여섯 시간 정도 기다리니 밥알이 삭아서 떠올랐다. 솥이 작으니 그 또한 한두 번으로는 부족해서 몇 번 계속하다 보니 꼬박 만 하루가 걸렸다. 식구가 많아 큰 밥솥이 있었더라면 시간을 좀 벌었겠지만, 그 또한 형편껏 할 일이다. 어쨌거나 식혜가 준비되었으니 조청의 반은 해결되었다. ‘시작이 반’이 아니라 정말 공정의 반은 해결이 된 것이다. 이제 밥알을 걸러낸 식혜 물을 끓이기만 하면 조청이 될 터이다.
그리고 오늘, 마당 모퉁이를 부엌 삼아서 녹슨 아궁이에 솥을 걸고 장작불로 조청을 고을 생각이었다. 이 야심 찬 계획을 하늘에 들켜버렸다. 수상쩍던 어제 하늘이 걱정되어 일어나자마자 밖을 내다보니 마당은 새하얀 눈으로 소복하다. 다행히 아침엔 그쳤지만, 예보에는 종일 눈이 온다고 한다. 반짝 잠시의 평화인지 모르겠으나 시리게 푸른 하늘이 예보를 비웃는 사이 아궁이에 솥을 걸고 장작을 날랐다.
봄도 아닌 겨울날이 이다지 변덕스러울 수 있을까? 기상 예보가 무안해할까 걱정이었는지 다시 함박눈이 퍼붓는다. 그나마 비가 아니라서 퍼붓는 눈이지만 아궁이 근처만 피한다면 불을 땔 수는 있겠다. 커다란 양산을 펼쳐서 솥과 장작을 가렸다. 식혜가 끓으면 뚜껑을 열어 두고 끓여야 하는데 눈이 들어가면 곤란하다. 예전에야 깨끗해서 내리는 눈을 먹기도 했지만 '상당히 나쁨'이었던 어제 공기 상태로는 안될 말이다.
화려한 장작불 덕분에 식혜 물은 잘도 끓었다. 가스 불에서 세 시간 걸렸다는데 불땀 좋은 장작으로 한 시간 반 정도 지나니 조청의 모양이 되었다. 그 사이에도 눈은, 그쳤다 더 했다 하면서 한껏 변덕을 부렸지만. 어쨌거나 맑은 식혜 물은 다갈색 조청이 되어 갔다.
엿기름이 당도를 좌우하는 줄 알고 양껏 다 넣었는데 알고 보니 조청은 밥의 양이 중요하다고 한다. 묵은쌀도 처리할 겸 해서 부담 없이 밥을 많다 싶게 한 것이 유효했나 보다. 마치 설탕을 넣기라도 한 듯 달착지근한 조청이 완성되었다. 조금 더 달이면 엿이 되겠지만 오늘은 조청이 목적지이다. 완성해 놓고 보니 조청은 꿀 병의 반이 조금 넘었다. 엿기름이나 밥의 양을 생각하니 터무니없는 양이었다. 이것으로 돈을 만들려고 생각한다면 도대체 얼마를 불러야 할까? 나로서는 가늠이 서지 않으나 이익을 목적한 것이 아니라서 실망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다. 다음엔 조금 더 장만해서 필요하다 하는 이에게 나누기를 희망한다. 처녀작인 오늘의 작품은 냉장고에 쟁여두고 물엿을 대신해 온갖 요리의 감초가 되어 줄 터이다.
2025년 벽두에 지붕도 없는 집 모퉁이 난장에 앉아서 장작불에 조청을 만든 오늘, 불장난이 아니었다. 비록 누군가는 쓸데없는 일이라 말할지 몰라도 난 꼭 하고 싶었던 한 건을 해낸 흥미로운 이틀간의 대장정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엄마의 또 다른 전수 음식에 도전하지 않을까? 해보지 않으면 절대 알지 못할, 잊히고 말지도 모를 음식 중에서 하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