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은 인정이다.
여권을 바꾸려 사진을 찍었다. 어떻게 비벼볼까 했었던 약은 생각이 결국 두 번 걸음을 하게 만들었다. 첫걸음엔 아무 의심 없이 여름에 찍었던 사진을 들고 갔었다. 현시점에서 6개월 이전의 사진이 필수 요건이었으나 계절이 두 번 바뀌었을 뿐이니 별문제를 의식하지 못했었다.
10년이 지난 여권 갱신이었다. 여권이 필요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시청에서는 여권 창구를 따로 운영하고 있었다. 자필로 신청서를 쓰면서 주변을 살폈다. 겅중겅중 제멋대로 뛰는 펜이 당황스러운 이유였다. 행여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망신스러운 글씨가 아닌가.
어깨 회전근개 봉합 수술을 한 후 회복이 덜 된 것인지, 아니면 신경 손상이라도 된 것인지 글씨를 쓴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던가. 익숙함 속에서 무시되는 수많은 감사를 해야 하는 것 중에는 내 의지대로 써지는 글씨도 있었음이다. 잘나고 예쁜 글씨가 문제가 아니었다. 마치 술이라도 취한 듯 겅중겅중 뛰는 획을 달래 겨우 신청서를 완성했다. 사진도 붙이고 차례를 기다려 창구에 서류를 내밀었다.
직원은 갱신을 위한다며 내민 내 여권을 먼저 말소했다. 그리고 진행하다 말고 언제 찍은 사진이냐 묻는다. 자신 있게 지난여름에 찍었음을 밝혔다. 여름옷이니 굳이 그것을 묻는 것은 아닐 터였다.
“주민증 사진과 같은 사진이네요.”
“네, 같이 찍어서 여권용으로 출력한 것이거든요.”
“23년에 주민증 재발급을 받으셨군요. 사진은 6개월 이내의 것이어야 합니다.”
“네?, 24년이 여름이 아닌가요?”
시간은 도통 내 느낌과 다르게 흐른다. 분명 올해 여름이었다고 믿었는데 1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뭐 특별히 기억해야 할 일이 없이 지나버린 1년이었다는 이야기였나? 기억에 저장해야 할 가치를 지니지 않은.
그렇게 거절되고 내친걸음에 처리해 버리고 싶은 마음에 사진관으로 향했다. 가까운 시간에 어디에 여행할 계획은 없지만 그래도 어쩐지 여권은 갱신해서 가지고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다행히 사진은 바로 그 자리에서 인화해 주었다. 다시 시청까지 가지 않아도 인터넷으로 신청 가능함을 시청 직원은 귀띔해 주었었다. 파일로 사진을 받아서 전자정부에서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대한민국 좋은 나라!) 그리고 다시 살펴본 내 사진.
언감생심 아직도 팽팽한 얼굴이라고 믿으며 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이 얼굴에 세월을 얹고 있어도 그들의 이야기려니 했다. 세수하고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은 아직 내 나이를 잘 따돌리고 있다고 생각했음이다. 그런데 오늘은 사진이 참 솔직했다. 입 주변으로 그동안 보이지 않던 주름들을 나이만큼 거느리고 있다니. 사진관이 너무 밝았었구나 싶었다.
눈썹 주변에 이물감이 느껴져서 모처럼 안경을 찾아 끼고 거울을 찾았다. 좁쌀만 한 트러블을 긁어내고 모처럼 밝은 불빛 아래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적당히 흐린 시력이 얼마나 세상을 무난하고 아름답게 하는지. 그동안 익숙한 얼굴 대신 잔주름이 나이만큼 앉아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팽팽한 줄 알았던, 젊은 줄 알았던 얼굴은 나이에 정직한 노안에서 비롯된 착시였다. 웃음이 나왔다. 젊고 주름 하나 없는 팽팽한 얼굴을 딱히 내세울 마음은 없었는데 정직한 얼굴에 왜 실망했었던 것일까?
쭉 젊은 모습을 간직하고 싶은 본심이었는지 모르겠다. 살아온 세월이 내게 준 훈장이라는 것은 어쭙잖은 객기였음이었던가. 그러나 뭐 어쩔 것인가?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데 부인한다고 부인되는 일인가. 시간에 맞는 모습이니 그에 맞는 정신을 갖추는 것이 더 맞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두 살짜리 손주가 어설프게 한 제 말의 의도를 알아맞히면
"맞아!"라고 밝고 맑은 표정으로 흔쾌히 대답해 주는 것처럼
"맞아.!"
살아온 시간에 맞는 사고를 하자, 헛바람은 거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