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민 May 09. 2023

도착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출발

어떤 출발

  - 어떤 출발


  도착을 염두에 두었던 출발은 아니었다.

  도착은 출발을 전제한다. 모든 것은 출발이고 도착의 산물이지만, 어떤 출발은 꼭 어떤 도착을 염두에 둔 건 아닐 것이다. 

  어느 해 한 단체에서 개설한 독서지도사 과정을 맡아달라는 의뢰를 받아 아주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요일마다 이동 거리가 있었던 다른 강의들과 학생들을 지도하는 수업도 있어 눈은 늘 신호등과 시계에 붙어있었다. 머릿속은 일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고, 살림이나 먹거리 준비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밤을 새우거나 잠을 터무니없이 줄이는 날이 허다했다. 화장은 늘 안에서 했고, 구르푸를 머리에 말아두고 목적지 주차장에서 머리를 정리했다. 

  제도권 밖에서 하는 일은 가시적인 성과가 필요했고, 그것은 수업의 평판과 상관관계가 있다. 어떤 땐 쉬운 방법도 있을 텐데 왜 이리 어렵게 사는지 스스로 반문한 적도 많았다. 

  아침 출근길, 터널을 앞두고 다른 날 보다 정체가 심해진 도로의 지루함에 무심코 차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터널을 중앙에 두고 불모산과 이어진 모든 산자락이 붉은 융단을 도톰하게 깔아놓은 듯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 지금이 가을이었지. 이렇게 가을에 도착해 있구나.'

  10월이라는, 가을이라는 건 물리적 숫자로 알고 있었지만 계절을 향유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어떤 이들과의 약속된 시간에 무언가를 전달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생활은 시간과의 허덕거림이었다. 내 생활 안에서 흐르는 시간은 온전한 내 것이 아니었다. 늘 타인을 위한 시간 안에서 종종거렸다. 

  그날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오롯이 나를 향한 시간은 정지되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매연에 찌든 희미한 조명들을 하나씩 밀어내며 지겨움이 느껴질 정도의 저속으로 터널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좀 사악하고 조숙해졌을 내 안에 깊이 숨어버린 나를 찾아보았다.

동백섬 백일장에서 바위돌에 앉아 연필을 꾹꾹 눌러 가며 글을 짓던 나,

아이들의 운동장 놀이가 허무하게 느껴졌던 나,

다른 교실과 달랐던 도서실 냄새를 좋아했던 나,

도서카드가 꼽힌 도서실의 작은 서랍을 여닫던 나,

옥상을 좋아하고 지도책과 기차를 좋아했던 나,

서향 창으로 들어온 햇빛에 색 바랜 책이 꽂혀있는 중학교 도서실을 드나들던 나,

명작 전집과 시 낭송 테이프를 어머니 허락 없이 할부로 샀던 그 시절의 나,

퇴근 후 조도 낮은 형광등이 비추는 시립도서관 서가를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나.

  나만의 방에서 혼자 무언지도 모를 한 톨 알갱이를 쥐고 있는 나를 그날 그렇게 다시 만났다. 

그리고 걸어본 적 없는, 단지 동경하며 기웃거리기만 했던 그 길에 한 발을 내디뎠다.

  그 길 앞에서 한 톨 알갱이만을 믿었고,  도착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출발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보랏빛 담은 바람은 거짓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