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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a Nov 13. 2018

앵무새 화장법 2

下. 지수는 사라졌다

지수는 여행을 가있는 동안 진호를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진호도 그러했으리라. 문득 하늘을 보고, 흐르는 구름을 보고. 정해진 누군가를 문득 떠올린다는 게 애초에 가능한 일이긴 한 걸까? 지수는 익숙한 도시에 가 익숙하지 않은 풍경을 뒤로하며 걸었다. 하루 종일 걷는 데에 시간을 썼다. 나라는 존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늘 그랬듯, 사실 버스를 탄들 지하철을 탄들 시간을 다 쏟아 걷는다고 한들 답은 지수에게 걸어오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너무 쉬운 일이었으니까.


진호에게 연락이 오지 않아 지수는 글을 쓸 수 없었다. 몇 안 되는 대화로 가득한 글을 마저 써 내릴 수가 없었다. 그것에 만큼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삶을 나누고 있지 않자 자신은 점점 지수가 아닌 사람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안되는데, 아직까지는 지수여야 하는데. 조금 더 지수이고 싶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을 때면 힘을 다한 낙엽이 어깨 위로 떨어지곤 했다. 한 계절의 끝자락이었다. 그렇게 지수의 여행도 끝에 다다랐다. 


걷다 지친 지수는 저녁도 먹지 않고 일찍 잠에 들었다. 새벽에 목이 갈라지는 통증에 눈을 부비며 일어났을 때, 진호에게서 메시지가 한통 왔다는 걸 알았다. 지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의 준비를 했다. 더 연락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의 연락이라 그랬을까. 지수는 깜깜한 숙소에서 조용히 물을 들이마시고 뚜껑을 닫지 않았다. 


지수씨 저 최근에 연락하는 사람이 생겨 앞으로 연락하지 못할 것 같아요. 진호는 메시지를 한통 보내왔다. 그 메시지에는 말줄임표가 없었다. 지수는 진호의 말을 곱씹었다. 나, 연락하는 사람이 생겼어. 나, 너에게는 더 이상 연락하지 못할 것 같아. 못할 것 같아요. 하고. 지수는 울지 않았다. 서운할 이유도 없었다. 다만 그가 어쩌다 자신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보내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어딘가 찔리는 구석이 없었더라면, 가끔씩이라도 좋으니 계속 연락했어도 좋았을 텐데. 암말 않고 말이야. 진호는. 진호에게 지수는. 진호에게 나는 뭐였길래 이렇게 정중하게 두 손으로 밀어냈을까? 분명한 이유가 있는 연락이었지만, 그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누군가의 세계 밖.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쫓겨난 바깥세상이 이렇게 고즈넉할 줄이야.


지수는 어느새 시간이 4시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내일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가보지 못했던 거리까지 걸으려면 이제는 자야 했다. 지수는 진호의 프로필 사진을 클릭했다. 그러곤 수수하게 웃고 있는 진호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제는 그 얼굴이 특별히 못나 보이지도 않았다. 진호 씨, 저를 좋아했나요? 사실, 그렇지 않았다는 거 다 알아요. 그러니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지수는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 뒤 진호를 망설임 없이 차단하고 자신도 어플을 지웠다. 삭제하기 전 계정을 탈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밤결에 진호야, 지수야 하며 이름을 더듬고 전화를 한 적도 없었으니 우리는 서로의 전화번호 조차 알지 못했다. 이제 다음날 아침 일어난 진호의 세상에서 지수란 사람은 사라져 있을 것이다.


반쯤 떴던 눈을 감고 다시 잠드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지수는 짧은 잠을 깊게 자고 일어나 아직 하늘에 별이 떠 있을 때 옷을 챙겨 입었다. 서로가 서로의 줄을 관통하는 체크무니 셔츠. 이곳저곳 실밥이 튀어나왔지만 버리지 않은 채 오랫동안 지수가 갖고 있던 유일한 옷이었다. 지수가 되기 전에도 입었던 옷. 셔츠와 웃옷 사이를 파고드는 바람이 지수의 마음을 부풀렸다. 지수는 어젯밤엔 잠들어버렸지만, 오늘은 꼭 기필코 진호와의 일들을 기억해두기로 마음먹었다. 바깥은 깜깜하니 글을 쓸 방법이 없어 지수는 귀에 이어폰을 꼽았다. 핸드폰을 입 앞에 가져다 대고 입술을 웅얼거리며 진호가 보내왔던 말들을 다시 한번 내뱉었다. 그 타래들을 녹음했다. 자신의 목소리로 듣는 진호의 말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한 번쯤은 진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생각했다. 진호라면 어떤 억양으로 저 말을 나름 자연스레 내뱉었을까 하고. 


지수는 진호가 추천해준 노래를 어느새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다 외웠다.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녹음을 끝냈다. 삼분 삼십오 초. 다시 한번 들어보니 이분 이십사 초 즈음 지수의 옆을 힘차게 뛰어가던 사람의 발소리가 큼지막하게 녹음된 것이 들렸다. 어디로 가길래 저렇게 목적지가 분명한 발소리일까. 지수는 그 발소리를 두어 번 돌려 들었다. 


아, 서울로 돌아가면 내가 살았던 곳과, 그리고 그곳과 가까운 진호의 대학이 있구나. 우리가 만날 뻔했던 상수 어딘가의 길거리도, 가로수길 어딘가의 길거리도 있겠구나. 어쩌면 네가 싫어하지도 모르는 나와, 너를 좋아할지도 몰랐던 내가 있겠구나. 그리고 네가 지금 좋아하게 된 사람도 있겠네.


생각은 발이 달린 듯 지수 대신 걸었다. 지수는 가던 길을 멈추고 길거리 벤치에 사뿐히 앉았다. 마치 이 의자에 앉기 위해 먼길을 온 사람처럼. 가방을 열어 물티슈를 꺼냈다. 그러곤 얼굴을 벅벅 문질러 지웠다. 지수는 어디든 서울이 아닌 곳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더는 지수가 될 수 없으니, 더는 지수로 살 수 없으니 서울로 돌아가선 안됐다. 지수는 가는 길에 새 화장품을 사야겠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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