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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a Nov 16. 2018

그대 내 이름 뒤에 숨어요.

여름 단편집 1

"이거 먹을래?


그래, 고마워. 효원은 희경이 건넨 음료수를 받아들었다. 차가운 음료수 잔 둘레로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이게 쥬씨라던가, 백종원이 하는 빽다방이라던가. 뭔진 잘 모르겠지만 아마 요즘 유행하는 음료수 가게인 것 같았다. 효원은 뭐가 갈렸는지 모를 음료수를 한모금 마시고는, 빨대에 남은 립스틱 자국을 손가락으로 비벼 없앴다. 빨대를 빠는 사이 벌써 착색된 연한 핑크색은 아무리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나 너 결혼식 때도 못갔잖아."


빨대를 빼고 컵째로 시원하게 음료수를 들이키는 희경의 모습은 여전히 경쾌했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변해가지만, 아마 효원의 주위에서 희경만큼 변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테다. 고등학교 시절 체육이 끝나고 수돗가에서 물을 뒤집어쓰던 희경의 모습과 방금전 모습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효원과 척 보기에 다른 사람이라는 것도. 쨍하게 내리쬐는 햇볓을 온몸으로 맞이하겠다는 양 반팔티 하나 입고 약속장소로 나온 희경과, 저녁이 되면 쌀쌀해질 수도 있으니 더울지언정 굳이굳이 잠바를 껴입고 나. 만나자마자 얼굴이 빨개져있는 걸 보고 희경이 대뜸 음료수부터 사온 걸 보니, 많이 더워보이긴 했나 보다.


"결혼식은 안 와도 됐어. 오늘은 할말이 있어서 부른거야."


"그래? 애들한테 연락온거보니까 너무 좋았다고 다들 그러던데. 근데 그런다고 한들 내가 갈 수 있었겠니. 입고 갈만한 옷도 없고. 알잖아, 나 사람많은데 가면 안어울리게 불안해하는거."


"결혼식 얘기는 정말 됐어. 더 안 해도 돼. 벌써 2년이나 지났는걸. 나야말로 연락도 안하다 불러내서 미안해. 빨리 얘기하고 갈께."


"그럼 같이 밥먹자. 음, 아님 좀 걸을까? 너 오늘 되게 지쳐보여. 내가 알던 이효원이긴 한데, 좀.. 이런말 해도 될진 모르겠는데... 짜증나보여."


희경은 망설이다 마지막 말을 꺼냈다. 짜증나보인다니, 아 정말 맞는 말이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희경은 이런 사람이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남의 속을 찌르는 말을 잘해서 누구도 희경을 막대하지 않았다. 희경 앞에서 사람들은 솔직해졌다. 솔직하지 않아도 희경은 다 알고 있을 테니까.


"그래. 미안해. 요즘 기분이 좀 그래. 좀 덥긴해도 광화문까지만 걸을까? 회사원 많은 곳에 맛있는 거 먹으러가자."


"그래, 이렇게 나와야 이효원이지. 야 회사원이 많은 곳에 가는 건 어떻게 한 발상이야? 크크. 그래. 걷자, 걸어."



희경은 금새 다 마신 음료수 컵을 버릴 쓰레기통을 찾느라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 틈을 타 효원은 불룩한 배를 움켜잡고 조심스레 일어났다.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잠바를 단단히 여미고 팔짱을 꼈다. 손에는 아직 반도 넘게 찰랑거리는 음료수가 남아 있었다. 희경은 싱긋 웃더니 이쪽으로 라고 말하곤 효원보다 조금 앞서 걷기 시작했다.



"너는 요즘 뭐하고 지냈니?"


"나야 뭐. 꾸준히 체육관에서 일했지 뭐. 시합 나가는 애들 봐주면서. 일년을 그렇게 시합주기에 맞춰서 살다보면, 내가 나가는것도 아닌데 매일같이 긴장하고 살게 돼. 그리고 그러다 보면 훌쩍 다음해가 와있더라."


"여전히 주짓수 도장에서 일하는 거야?"


"응. 땀에 전 채로 살아. 오늘은 안하고 왔으니까 걱정 말고. 그래도 요즘은 휴가나, 쉬는 날에는 도서관도 나가고 그래봤어. 나이도 나이겠다, 주변에 친구들은 다 결혼하고 없고. 나도 뭐라도 내 친구를 만들어야겠더라고."


"연락했는데 닿아서 되게 놀랐어. 너가 여전히 도장에서 일하고 있을 줄은 알았지만, 번호도 안바꾸고 살고 있을줄은 잘 몰랐거든. 그리고 이렇게 휴일이 맞아서 너가 나와줄 수 있을지도 몰랐고."


"그건 나도 몰랐어. 나라고 너한테, 이효원한테 연락이 올 줄 알았겠냐?"



희경이 걷다 말고 큰 소리로 웃었다. 거리를 걷던 무신경한 사람들이 잠시 돌아볼 정도로 호탕했다. 효원도 그 웃음에 미소를 얹으며 화답했다. 자신에겐 너무나 큰 이야기가 있는데, 그걸 어떻게 뱉어내야 할지 기회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효원은 무서웠다. 희경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다 말고 등을 돌릴 수도 있었고, 아니 희경이라면. 자신이 아는 희경이라면 경찰에 신고를 한다던지, 자신에게 강경한 대처를 해야 한다 말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것은 자신이 희경에게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희경에게 무엇을 바라고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러 길을 나선 것인지는 몰랐지만.


그들의 걸음은 꽤나 빨라서 어느새 안국역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평일 점심께의 빌딩 숲. 우락부락 언젠지도 모르게 솟아난 것들이 모두 효원에겐 성난 제 속같다.



"그래서.. 나는 이제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면 되는거야?"


희경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효원의 앞에서 물었다. 그둘은 질문을 끝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걸었다. 희경에게 누군가 도를 아시냐고 물으며 팔을 붙잡을 때까지.


보다못한 효원이 그 둘 사이를 끊고 희경을 가로채 팔짱을 끼곤 도망치는 사람처럼 걸었다.



"야 역시 이효원 대단하다. 나는 운동하는 사람인데도, 저런 사람들 보면 어떻게 대해야할지 하나도 모르겠대니까. 끝까지 들어줘야 예의인건지, 뭐라고 대답을 해줘야 하는.."


"희경아 나 강간당했어."



첫마디를 끝으로 효원은 다음 말을 할때까지 시간을 들였다. 희경의 표정을 올려다보니 희경은 생각했던 것보단 심각한 일이었던 건지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다. 효원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히려 전보다 빨리 걸었다. 희경은 털레털레 팔짱 낀 효원에게 끌려가듯 걸었다.



"희경아. 너도 알지? 나 세민씨랑 결혼한거. 우리, 결혼하고 나서 관계를 한 번도 안가졌어. 내가 일방적으로 거부했거든. 언제든. 어느 날이든. 아니 딱히 거부라고 할 것도 없었어. 그이도 하겠다는 눈치를 준 적이 없었거든. 나는 연애 한번도 안해보고 세민씨랑 결혼부터 했잖아. 친구여서 그랬어. 같이 오랫동안 살 부대끼고 살꺼, 친구랑 하면 좋겠다 하서 한거지. 나는 세민씨도 그런줄알았어. 근데 아니었나봐."



"결혼한지 2년이나 됬는데 아기소식이 없으니까 양쪽 집에서 난리가 난거지. 나는 우리가 어떻게든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어. 정 그렇게 아기를 원하시면, 때가 되면 입양을 한다던지. 뭐 그런 방법을 말야. 나는 내 직장에서, 세민씨는 세민씨 직장에서 잘 일하고 있었고. 우리 둘 다 아기를 갖게 되는 순간 인생이 크게 뒤바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특히나 내 인생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됬었겠지."



이야기를 시작하고 나니 효원의 입에선 비디오 테잎이 감기듯, 장면들이 나열되었다. 효원은 말을 하면서도, 이 이야기가 끝나면 어떻게 될지 상상했다. 속이라도 후련해질까? 그거면 됬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제는 배도 불러서 숨길 수 없는 때가 되었고, 자신은 이제 이 배 뒤로 숨어 살아야 했다.



"그런데 있잖아, 회사에서 늦게 까지 일하고 온날 밤이었는데 집이 다 깜깜했어. 분명 세민씨가 먼저 퇴근했을 텐데 회식이라도 하고 오나 싶었지. 우리 사실 거의 연락도 안하고 지내거든. 나이 맞춰서 결혼만 한거고, 같은 집에 살고 있는거니까. 나는 피곤해서 씻고 시간이 몇신지도 안보고 침대에 누웠어."



"아마 나는 바로 잠들었을거야. 그런데 분명히 문이 열리는 소리가 안들렸는데 누가 뒤에서 이불로 내 머리를 누르는 거야. 강도가 든 줄 알았어. 난 이렇게 내가 죽는구나 싶었어. 침대에 얼굴이 파묻혀서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러도 내 귀에 밖에 안들렸어. 바지가 뜯겨져 나가는게 느껴졌어. 속옷이 벗겨지는게 느껴졌어. 숨이 막혀서 팔로 어떻게든 일어나보려고 매트리스를 긁어댔어. 다리 사이로 뭔가가 뚫고 들어오는 걸 느꼈어. 나는 끝까지 소리를 지르며 발악했어. 근데 얼마 안가 그걸 멈췄어. 왜 였는지 알아? 누군지도 모르는 그 사람이 나를 강간하는데... 강간했는데.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버렸거든."



"오분도 안지나서 그 사람이 술냄새를 잔뜩 풍기면서 내 머리를 짓누르던것도 놓고, 내 위로 엎어지더라고. 그리고 사랑한다 말하더라. 쭉 사랑해왔다고 말하더라. 사랑하는데 이것도 하면 안되냐고 말하더라. 자기 좀 사랑해주면 안되냐고 말하더라. 누구였는지 알겠어? 세민씨였어."



팔짱을 끼고 있던 희경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들의 걸음걸이는 이제 걷지 않는 거나 다름 없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희경은 맨 처음처럼,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됬어...”


" 어떻게 되긴.. 나는 정신 나간 사람 처럼 침대에서만 누워있었어. 세민씨를 보면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당장 내집에서 나가라고 접시도 던져봤어. 그새끼, 그 미친새끼. 부탁이니까 임테기 좀 써달라고 그러더라. 나는 그걸 다 잘근잘근 씹어서 부러트렸어. 그리고 그 새끼 앞에서 다 뱉었어. 회사는 내가 안나오니까 전화 몇 번하고 잘렸다고 통보오더라. 그 새끼는 매일같이 내가 도망가진 않을지 엄청나게 고민하는 눈을 하다가 출근시간이 되면 사라지곤 했어. 그러면 난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어. 죽어버릴라고. 평생 안하던 짓을 다 했지. 배도 하나도 고프지 않았어. 머리끝까지 화만 났어.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했다는 생각, 애초에 믿으면 안되는 사람을 믿었다는 생각, 내가 바보같이, 내가 뭐라고, 결혼이 뭐라고, 그따위게 뭐라고. 남들 시선이 뭐라고 내가 그 앞에 혼자 나서는게 무서워서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하고."


희경은 팔짱을 빼고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먼 산을 보고 걸었다. 아 이대로 희경이가 가는구나. 그래, 사실 희경이한테서 답을 찾으려 했던 내가 또 미련한거야. 알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에게 내가 짐을 지어준 거야.



"희경아 미안해. 나 정말 누구에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어. 배가 부르고 나서야, 먹는 것들을 다 토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임신을 했다는 걸 알았어. 견딜 수가 없었어. 그 새끼는 양쪽 가족에게 경사라도 난 것 마냥 연락을 돌렸어. 나 이제 도망못가. 시어머니가 내 집에서 머무르신대. 내가 일도 아기 때문에 그만둔줄 아셔. 나 이제 어디로도 못 돌아가. 희경아... 희경아..."



효원은 고개를 처박고 말을 하다 말고 어느새 말들이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진 희경을 보며 울음을 욱여넣었다. 이대로 또다시 집이 아닌 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게 효원을 죽고 싶게 만들었다. 자신의 몸에 또다른 생명이 들어있다는게 경멸스러웠다. 자신이 증오하는 사람의 일부가 자신 안에 들어왔다는 것이 증오스러웠다. 자신은 이대로 평생 이 증오를 숨긴채로, 상냥한 사람의 미소를 짓고 어느 사람의 아내로 또 엄마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증오스러웠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그대로 기어들어가고 싶었다. 아무일도 없었단 듯, 보통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효원 잘들어. 그럴때면 너는 이효원이 아니라 손희경이 되는거야. 아이를 배고 있지도 않고, 아이를 낳아야 하지도 않고, 아이를 길러야 하지도 않는. 앞으로도 그럴일이 없는 손희경이 되는거야. 매일 아침마다 시어머니 눈치를 보며 무엇을 끓여 국으로 내놓고, 출근하는 남편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하고, 등을 맞대고 자야할지 끌어안겨 자야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내가 되는거야. 소리지르며 싸우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손희경이 되는 거야. 내가 네 인생을 구해줄 수는 없어. 정말 미안하지만 구해줄 수가 없어. 나와 함께 살자고 해줄 수도 없어. 너가 그곳에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가끔씩은, 정말로. 내 이름 뒤에 숨겨 줄께. 손희경이라는 사람 뒤에서 네가 숨을 쉴 수 있게 해줄께. 이 징글징글하고 더운 여름이 가면, 다시 그 여름이 오기 전에 너는 자유가 될 수 있을 거야. 내 말 무슨 말인 줄 알지?"



어느새 다가온 희경은 효원의 어깨에 팔을 살짝 둘렀다. 광화문이 코앞이었지만 그들은 더 걸을 수 없었다. 효원은 두팔을 얼굴로 올려 다신 울 수 없을 만큼 울었다. 먹다 마신 음료수 컵이 길 바닥에서 나뒹굴었다.



"오늘 날씨 되게 덥다. 이런게 여름인가봐, 그치 효원아?"


효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다니는 사람중 누구도 그들을 쳐다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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