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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lli Oct 07. 2024

파도 하나에 얼굴 하나


카이막을 먹으러 버스를 타고 카페에 왔다. 이번 제주행은 벌써 11번째였지만 제주에 와서 버스를 타 본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상기되어 있었다. 제주는 아무리 와도 매번 새로워서 좋다. 내가 탄 버스는 시외버스처럼 4열 좌석으로 이루어진 버스였다. 앞에서 두런두런 들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제주도 사투리가 정겨웠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10분 정도 밖에서 기다렸다. 토요일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정신과와 피부과 진료를 미루고, 교수님께 월요일 약속을 수요일로 미루자는 카톡 예약 문자를 보냈다. 숙소는 천천히 알아봐도 될 것 같다. 호텔에 가도 되고, 게하에 다시 가도 되니까.


제주 바다는 멀리서 보면 수평선이 내 눈높이 보다 높은 느낌이다. 그래서 바다 끝이 더 하늘 위로 올라간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바다를 보면서 생애최초로 카이막을 먹고 있으니 현실 감각마저 사라져 버린 기분이다. 카이막보다 오랜만에 마시는 터키식 홍차(차이)를 마시니 첫 해외여행을 갔을 때가 떠오른다. 그 더운 여름, 터키 사람들은 노상에 앉아 이 뜨거운 차이를 마시며 일상을 나눴다. 지나가는 낯선 여행자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한 잔씩 권했고 덕분에 그 여행기간 내내 차이 티를 얼마나 마셨는지 모른다. 우리랑 다른 점은 그 안에 각설탕을 한 4개씩 넣어서 마셨는데, 나중에 우리는 “노 슈가”라고 외치면서 차이만 마셨다. 벌써 17년 전의 기억인데도 여전히 생생한 걸 보니, 이 차이 향은 여전히 똑같은 걸 보니 다행이라는 안도감마저 든다. 이번 여행은 P처럼 살기였지만 역시 그건 나에게 어려운 일이다. 그냥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걸 먼저 해야겠다. P든 J든 마음의 집착을 버리는 것, 그것만 해도 되지 않을까.


이번 여행에서는 시작부터 감사한 이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윤동주는 별 하나에 이름을, 패경옥이라는 이름을 떠올렸지만 나는 들이쳤다 흩어지는 파도를 보면서 나를 살게 한 이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린다. 새벽 5시에 버스를 타러 갈 때 혹시 택시가 잡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3분 만에 도착한 택시를 보며 그 새벽에 운행을 하시는 택시 기사님께 무한 감사를 느꼈다. 그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여행을 시작조차 못했을 테니까. 제주에 도착해서 공항에서 호텔 셔틀을 타고 짐을 풀어놓고 근처에 밥을 먹으러 나갔다. 제주는 일요일에 빠져나가는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대부분의 가게가 일요일이 휴업일이다. 미리 찾아봤던 고기국숫집에 갔더니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그나마 여기 사장님이 문을 열어서 내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이 또한 감사한 일이다. 저녁에는 근처에 통닭집이 유명한 곳이 있다고 해서 사러 갔었다. 사실 혼자 치킨을 시켜 먹는 일조차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인데, 겉절이랑 밥이랑 치킨이랑 싸 먹는 곳이라고 해서 궁금해서 사러 갔다. 1시간 전에 예약을 해야 하는데 그냥 갔더니 사장님이 30분만 기다리면 될 것 같다고 하시고, 기다리는 내게 떡도 하나 주셨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타인의 친절에 그저 “감사합니다.” 밖에 할 말이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때로 말은 그 너머의 진심까지 충분히 전달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수많은 비언어적 표현을 함께 수반하지만, 처음 보는 이에게 오바쌈바를 떨기엔 난 다분히 정적인 인간이다.


내가 뭘 하든 항상 “우리 00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우리 00가 제일 이쁘고 귀엽다.”면서 우쭈쭈 해주는 내 소중한 친구들, 내 쓸데없는 고민 진지하게 들어주고 크게 웃어주면서 그래서 우리 00 이가 너무 좋다고, 나도 모르는 내 속마음까지 읽어주면서, 내가 뭘 하든 어딜 가든 이쁘다 즐거워라 행복해져라 해주는 내 숨 같은 황라희, 여행 온 순간부터 맛집 보내주고, 내가 보내준 사진마다 리액션 해주면서 즐거운 여행되라고 응원해 주는 태영이(태영이 덕분이 지금 난 여기 카이막 집에서 터기를 떠올릴 수 있는 거다), 평소에 연락도 안 하면서 꼭 연애고민만 상담하는 나에게 나는 대단하고 멋지고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용기라이팅 해주는 나영이, 나 힘들어서 병가 냈다는 소식에 단박에 전화해서 만나자고 하고 내 얘기 들어주고 자기도 힘들었던 얘기 소탈하게 전해주며 같이 힘내자고 하던 소영이, 병가 이야기 들었다면서 언제든지 밥 한 번 꼭 먹자고 전화 달라고 하셨던 민희샘, 내 가을 방학 축하한다고 이번 기회에 푹 쉬고 돌아오라고 파티까지 열어주고 항상 나를 지지해 주는 작년 같은 팀 사람들, 어떻게 알고 나 힘들 때마다 전화 주면서 무슨 일 없냐고 나조차 나를 질책하고 있을 때 나는 강한 사람이고 이번에도 잘 이겨낼 거라고 나 대신 확신해 주는 이령언니, 항상 공부 안 하는 불제자의 내러티브에 질책 하나 없이 위로와 용기를 주시면서 금방 괜찮아질 거라고 밥 먹으러 오라고 연락 주시던 교수님, 밥 사 줄 테니 오라고 하셔서 동네 맛집에서 맛있는 거 사주시고 아무 생각 없이 푹 쉬고 오라던 부장님,  내 마음이 힘든 건 당연한 거라고 그동안 주변 사람들 생각만 했으니 이제는 자기 생각만 하라고 했던 의사샘, 내 감각과 감정에 집중하는 법을 알려주신 상담사샘, 내가 가장 힘들었던 날에 걱정과 위로로 나를 낫게 해 주었던 한의사샘, 나의 안위와 평안을 걱정해 주는 많은 친구들, 그들 덕에 내가 숨 쉴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밀려왔다 흩어지는 파도를 보면서 나를 살게 한 이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다시 돌아가면 이 마음을 다 갚으면서 살아야지,

다시 돌아가면 그들 덕에 충만해진 이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야지.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감사한 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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