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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볕뉘 Feb 23. 2024

애도백서를 써볼까

‘일을 하며 음악을 들으며 혼자서 간혹 울 때가 있다. 음악, 문학, 무용, 연극 - 모두 사람을 울리는데 미술은 그렇지 않다. 울리는 미술은 못 할 것인가’


영국 국립 초상화 갤러리 개관 시간을 기다리며 어느 카페에서 김환기 화백의 뉴욕 일기를 읽고 있었다. 울리는 미술도 분명 있었던 것 같은데-라고 곰곰 생각하며 위 문장에 밑줄을 죽죽 그었다. 그리고 방문한 호크니의 전시에서, 나는 아침에 만났던 질문에 몸소 답이라도 하려는 듯 어느 그림 앞에서 펑펑 울었다. 


호크니가 노트 한 장에 잠든 노년의 어머니를 담은 드로잉이었다. 늙은 그녀의 잠든 얼굴을 보자마자 이상하게 울컥했고, ‘Mum’이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내 안의 코르크 마개가 마저 뻥 하고 터져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드로잉 한 장이 내 안에서 어떤 화학작용을 이루어냈는지 그 알고리즘을 여전히 알 수 없기에 이상하다는 말을 붙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 분명한 건 어떻게든 내 마음이 ‘나의 엄마의 엄마’에 닿게 했다는 것이다.


호크니는 일상에서 포착한 수많은 순간들을 그려왔다. 특히 자신이 애착을 가진 인물들에 대해서는 그의 초상화를 오랜 세월 동안 반복적으로 그려왔다. 그렇기에 전시는 인물 별로 방이 나누어져 있었는데, 특히 엄마를 그린 그림들은 어느 한쪽 구석에 자리한 가장 아담한 방에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었다. 열 걸음 정도면 사방을 다 둘러볼 수 있었던 그 조그마한 방에서, 그리고 유독 아기자기한 크기의 드로잉 몇 점 앞에서, 나는 한참을 가만히 머물렀다. 호크니의 엄마의 얼굴에서(어머니보다는 엄마가 적확한 느낌이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나의 외할머니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호크니의 시선과 손으로 그려낸 노년 여성의 알록달록한 초상화엔 깨질 것 같은 묘한 연약함이 묻어있었다. 그런 얼굴들로 둘러싸인 나는 다정함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면서, 아 이 방은 온통 사랑으로 가득하네-라고 속으로 내뱉었다. 종이 몇 장에 맑은 색깔의 선들로 압축된 사랑이 너무 강렬했다. 그리고 그 강렬함은 나를 외할머니로 이끌었다. 나는 또 울 걸 알면서도 모든 전시를 다 구경한 뒤에 그 방을 한 번 더 들렀다. 슬픈데 포근해지는 기분을 또 느끼려고.




오늘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작년 이맘때엔 마음을 졸이며 병원을 몇 번씩 드나들다가 난생처음 장례를 치렀었는데, 오늘은 난생처음 나와 긴밀히 연결된 이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할머니가 꺼내 쓰시던 제기에 할머니에게 드릴 음식을 차리다니 기분이 생경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대학생이 될 때까지 할머니와 붙어 살았다. 치매를 앓게 된 할머니는 중학생 때부터 나를 알아보지 못하셨다. 할머니가 본연의 할머니로 존재하던 시절에서부터 음식을 씹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온종일 가만히 누워계실 수밖에 없던 날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는 동안, 내 중심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뒤섞여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자라났다. 자취하던 날들엔 자려고 누웠다가도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이 결국 요양원에 같은 자세로 누워계실 할머니로 도착하는 날이 빈번했다. 그러면 당신의 시간은 지금쯤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 생각하다 각티슈 한 통을 비우곤 했다. 


할머니는 이젠 없다. 그런데도 분명히 있다. 끊어낼 수 없는 사랑이고 슬픔이라서 오랜 시간에 걸친 애도의 순간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난 시간이 좀 걸리는 쪽일 것 같다. 그사이에 겪을 다양한 애도의 작업들은 나를 꾸준히 키워내리라 믿어 본다. 제사를 지내곤 눈물 콧물 다 짜는 와중에도 마법의 물약 마냥 할머니의 제사술을 두 잔이나 야무지게 들이켜니 약간은 위안이 됐달까.


무엇보다 슬픔의 누수로 내면이 녹슬어 망가지지 않도록 나를 울리면서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순간들을 자꾸만 찾아다닐 것 같다. 울리는 미술 앞에서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던 것처럼. (사실 의도치 않아도 우연히 맞이하게 되는 날들이 많다. 엊그제 엄마의 옷 정리를 돕다가 마음에 쏙 들어 내가 입겠다고 챙긴 초록색 조끼가 할무니의 옷이다. 늘상 자연스럽게 이렇게 되곤 한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에 대해서 앞으로도 이렇게 글을 쓸 수밖에 없겠다는 예감도 든다. 어쩌면 이건 내가 앞으로 쓸 글들의 서문일 수도.



결국에 이렇게 오만가지 방법을 통해서 익히고 싶은 건 이 복잡한 감정을 무찌르는 게 아니라 제대로 간직하는 법이다. 



p.s. 카페에서 적으려다가 계속 눈물이 흘러서 쓰다가 멈췄다. 어쩌면 다른 손님들은 내가 실연이라도 당한 줄 알 수도. 다행히 할무니에 대한 내 사랑은 거절 당할리 만무하단 점에서 마음은 오히려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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