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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루무비 Sep 14. 2021

내밀한 감각을 일깨우는 편지의 수사학

<윤희에게(2019)> 리뷰 (임대형 감독, 김희애 주연)

  ‘윤희에게’는 준(나카무라 유코 분)이 윤희(김희애 분)에게 보내는 편지의 첫 마디이다. 임대형 감독은 인터뷰에서 “말의 방향성이 모든 대상에게 다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한 사람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편지는 특별하다고 말한다. 편지의 내밀한 ‘말’들은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 두 사람만이 해독할 수 있는 비밀 기호들로 둘러싸여 있다. 마사코 고모(키노 하나 분)나 새봄(김소혜 분) 같은 눈치 빠른 누군가가 그 뉘앙스에서 풍기는 묘한 분위기를 잡아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편지 위에 눈(雪)처럼 켜켜이 쌓인, 오로지 둘만의 시간들은 그만큼이나 많은 각주를 감추고 있다. 따라서 이를 알지 못하는 독자가 편지를 온전하게 복원해내는 일은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준을 만나기 위해 오타루로 떠나기 전까지의 윤희는 마치 그 어떤 것도 감각하지 않으려고 작정한 사람 같다. 윤희는 맛을 음미하며 음식을 먹거나 냄새를 맡지도 않는다.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고 뚫어져라 쳐다보는 일도 없다. 딸 새봄과 하는 짧은 식사도 살기 위해 끼니를 때우는 모습에 가깝지 무엇을 감각하는 행위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신체 내부를 천천히 관통하며 쓸어내려가는 담배 연기만이 그가 감각하는 전부인 듯하다. 표정도 대사도 몸짓도 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기표가 되지는 못한다. 그는 살아가고는 있지만 차라리 죽음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건 아마 준과 헤어진 이후의 윤희가 가족과 사회의 규범 내에 정주하도록 강요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소수자로 낙인찍히는 삶을 살아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가족들에게마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는 광인으로 정의 내려져 정신병원에 다녀야만 했고 그리고 나서는 그의 정상성을 증명하기 위해 쫓기듯이 결혼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가 결혼후 정상 가족을 이루었다고 해서 평범한 삶을   있게  것은 아니었다. 영화에서 전부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는 이혼 이후 딸을 혼자 키우는 싱글맘으로서 , 크게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다는 이유로 공장에서 일하게  급식실 아줌마로서 수많은 무시와 차별을 견뎌야만 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서 원하는 공부를 하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는 것도,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직업을 선택하는 것도,  어떤 것도 그에게는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준의 편지를 읽는 순간 그런 윤희의 안에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또 얼마나 많은 감각들이 되살아났을까. 마침내 준의 편지를 마주하고 나서야 윤희는 비로소 자신의 바로 옆을 스치듯 지나가는 기차의 아찔한 속도를 감각한다. 자신이 아직 세계 안에 살아 있는 존재임을 분명하게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준을 만나러 오타루로 간 윤희는 차가운 눈을 두 손으로 뭉쳐 새봄과 눈싸움을 하며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다. 윤희는 이제 케이크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준을 다시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윤희는 다시 예전처럼 카메라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눈앞에 있는 대상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윤희의 말처럼 ‘그처럼 충만했던 시절은 또 오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행위의 주체로서, 욕망의 주체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윤희는 기억해낸 것이다.



  오타루 여행 이후 윤희는 이제 자신을 얽매던 현실의 대리인인 오빠로부터 벗어난다. 그의 삶에 있어 매우 혁명적인 순간이지만 윤희는 아주 담담하게 오빠의 사진관을 떠난다. ‘네가 무슨 기술이 있어 경력이 있어’라며 또 다시 그를 현실에 주저앉히려는 오빠에 윽박에도 그저 차분히 대꾸할 뿐이다. 윤희는 이제 자신이 감각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아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차가운 눈의 감각 위에서 찍힌 윤희의 얼굴은 너무나 눈부시고 경수(성유빈 분)의 말마따나 ‘진짜 멋지시’다. 이력서 최종학력에 망설임 없이 고졸이라고 채워 넣는 윤희의 손도, 일하고 싶은 식당의 문을 잡고 긴장한 내색을 감추지 못하는 윤희의 떨리는 뒷모습도, 언제나 자신의 꿈속을 살아가고 있었던 준을 고백할 수 있게 된 윤희의 편지도 정말이지 너무나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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