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온다(2018)> 리뷰 (윤미아 감독)
<봄은 온다>라는 제목 속 ‘봄’은 잠시 흑백이 되었던 세상이 다채로운 색을 되찾는 시기이다. 쓰나미에 무너졌던 꽃집이 다시 장사를 시작하고, 축제가 열린 마을의 하늘에는 불꽃이 수놓아진다. 세상에서 사라진 ‘색’이 다양한 꽃과 함께 돌아오는 것이다. 봄에 돌아오는 것은 비단 ‘색’만이 아니다. 봄은 혹독했던 겨울의 종결이 공식화되는 시기이며 소위 만물이 소생하는 시기이다. 오랜 동면으로 보이지 않던 동물들도 살얼음을 깨고 고개를 내민다. 그리고 결국에는 사람이, 그리고 ‘일상’이 돌아온다.
그런데 돌아오는, 아니 돌아가야 할 ‘일상’이란 것은 무엇일까. 재난이 터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완벽했던 ‘평온한 일상’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기는 했던 걸까. 일본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은 방식으로 건설된 원자력 발전소에 인접한 마을의 하루하루는 정말 ‘평온’했던 걸까. ‘평온한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가장되고, 과장된 잠재적 재난 상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그 날’은 단지 우연한 ‘사고’로 명명되고 만다. 오프닝과 엔딩 시퀀스에서 슬로우 모션으로 촬영된 재난 이후 일상들의 몽타주는 그래서 그런지 마냥 평화로워 보이지만은 않는다. 미묘한 서스펜스가 일상의 몽타주 속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봄은 분명 회복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지만, 결국 반드시 다시 맞이하게 될 겨울을 준비하는 시기를 동시에 의미한다. 아이들의 보물찾기 시퀀스에서처럼, ‘집터’에 묻힌 유물들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 불현듯 발견될 것이다.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는 이들과 우리는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감히, 연대할 수 있을까.
예전에 폼페이와 관련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봄은 온다>를 보면서 그때 읽은 책의 내용이 종종 겹쳐 보였다. 화산 폭발이라는 비극적인 재난으로 대부분의 시민이 생매장된 폼페이는 이천 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이다. 관광객들은 재해의 현장 앞에서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고 가이드는 순식간에 일어난 재난을 미처 피하지 못해 생매장된 젊은 연인의 이야기를 무미건조하게 반복한다. 또, 사람이 갇힌 모양 그대로 굳은 화산재는 밀로의 비너스와 같은 유명 대리석 조각처럼 박물관에 전시되는 예술작품이 되었다. 이천 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우리는 끔찍했던 재난 현장 앞에서 덤덤함을 넘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걸까. 불판 위의 고기를 보는 일도 때론 힘겹다는 한강 작가의 말이 불현듯 떠오른다. ‘폭력에 대한 감수성’에 있어 우리는 얼마든지 더 민감해져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