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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루무비 Jan 03. 2019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아이 엠 러브(2009)> 리뷰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

  ‘나’는 누구인가. ‘나’는 굉장히 다양한 부분들로 구성된다. 내가 입는 옷, 내가 먹는 음식, 내가 사는 집, 그리고 나와 관계하는 사람들. 이런 다양한 것들에 의해서 ‘나’는 정의된다. 그런데 내가 즐겨 먹는 음식은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일까, 아니면 남들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나 역시 좋아한다고 믿는 것일까. 옷과 집도 마찬가지이다. 그 어떤 것도 나를 완벽하게 설명해줄 수는 없다. 물론 그것들이 ‘나’를 설명하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들의 합이 바로 나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영화 초반 엠마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관객은 다양한 단서를 모은다. 그는 성공한 사업가 가문의 구성원이고 카메라 안에 다 담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거대한 저택에서 수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누구나 한 번쯤 동경하는 삶의 주인공처럼 보이는 그는 그러나 웃고 있어도 어딘가 텅 빈 느낌을 준다. 러시아에서 온 ‘이민자’이자 ‘며느리’인 그는 영원한 타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주관적인 자신의 감각에 있어서조차 주인이 될 수 없다. 그는 좋아하는 음식과 편한 옷, 아늑한 ‘자기만의 방’을 욕망할 수 없다. 그저 ‘사모님’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감내할 뿐이다. 그 무엇도 온전하게 엠마 자신의 것일 수 없다. 심지어는 엠마라는 이름조차 남편이 지어준 배역명에 불과하다.

  그러던 엠마는 안토니오와 만난 이후 조금씩 자신을 삶의 중심에 놓는 법을 연습하게 된다. 엠마는 풀을 쓰다듬으며 촉감을 느끼고 그것들의 향을 맡기 시작한다. 또 안토니오가 만든 새우의 맛을 음미하며 엠마는 자신에게도 좋아하는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엄마가 되며 잊어버리도록 강요받았던 감각들이 ‘엠마’에게 되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엠마는 그런 자신을 큰 아들 에도는 이해해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고백한 베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사람도, 러시아인으로서의 엠마의 정체성을 사랑해주는 사람도 에도뿐이었다. 그렇기에 엠마는 두려워하면서도 내심 에도로부터 인정받길 원한다. 자신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아들이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인연을 만나는 건 고독만큼 멋진 거야. 우린 용기를 내야 해.”라고 말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에도는 그런 엠마를 끝내 부정한다. ‘엄마’ 역시 사랑할 수 있고 또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엠마의 손을 거칠게 뿌리친 에도는 수영장으로 넘어지는 순간 돌에 머리를 부딪쳐 죽고 만다. 그렇게 에도는 진짜 ‘엠마’와 마주하기를 온몸으로 거부한다. 이제 엠마는 선택의 기로 위에 선다. ‘엄마’로서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해야 하는 무대 위로 되돌아오기를 선택한다면 엠마는 아들을 잃은 엄마의 슬픔에 온전히 사로잡힌 뒤 이 모든 일을 자책하며 평생 사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빛이 완전히 차단된 방에 쓰러져 있던 엠마는 과감하게 ‘엄마’로서의 정체성을 함께 장례 지낸다. 마치 초혼처럼 키티쉬와 엠마, 사모님을 부르는 목소리가 차례로 지나간 뒤에야 그는 천천히 밖으로 나와 말한다. “당신이 알던 나는 이제 없어”라고. 그리고 고백한다. ‘나는 사랑이다(I am love)’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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