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의 카메라(2017)> 리뷰 (홍상수 감독)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은 아주 분명하게 눈앞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대상은 언제나 보는 사람에 의해 의미화되고 재구성된다. 대상은 과거의 기억들이 얼키설키 얽힌 조각보이고 보는 사람이 기대하는 이상에 가깝도록 변형된 환상이다. 보는 사람은 대상이 항상 이상적인 상태에서 크게 변화하지 않는 존재이길 바라지만 너무도 당연하게 대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노화하며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소완수 역시 그러한 시선으로 대상들을 바라본다. 그는 대상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 상태에 머물러 있길 강요한다. 양혜는 ‘지금도 예뻐’야 하고(이것은 지금도 예쁘다는 칭찬이라기보다는 지금도 예뻐야 한다는 강요이자 강박이다) 만희는 ‘순수’ 그 자체인 상태로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만희는 눈 화장을 아주 조금 더 짙게 했을 뿐이고(실제로 몇몇 둔감한 관객은 만희의 화장이 달라졌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만희를 ‘싸구려’로 만드는 것은 만희 자신이 아니라 만희를 ‘잘못 보는’ 소완수의 시선이다.
그런 소완수와 반대되는 위치에 서있는 인물이 ‘클레어’이다. 처음부터 본인이 예술가라는 자의식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는 소완수와 달리 클레어는 처음에는 자신을 예술가라고 정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중에는 ‘시를 쓰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자기만의 시창작론을 이야기하고 스스로를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소개한다. 그는 변화한 자신을 재정의하는 데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는 카메라를 통해 현재의 대상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대상의 ‘지금, 여기’를 포착한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대상의 시간에 점을 찍어 선형의 시간에 마디를 만드는 일이다. 클레어는 자신은 대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고 고백한다. “무언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만히 천천히 다시 들여다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클레어는 만희가 제멋대로 찢어 놓은 천에서도 그것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들여다본다. 소완수와의 시선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그것이다. 소완수라면 마구 잘리기 전의 천이 얼마나 보드랍고 아름다웠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대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노화하며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클레어는 그러한 변화와 노화 그리고 심지어는 죽음, 즉 완전한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물론 그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웠겠지만, 클레어는 결국 ‘대상을 제대로 보는’ 데 성공한다. 클레어의 카메라 렌즈에는 어쩐지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있을 것만 같다: 대상은 언제나 보이는 것보다 '멀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