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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루무비 Jan 09. 2019

있는 그대로 '깜빡'이는 존재-되기

<주먹왕 랄프 2(2018)> 리뷰 (필 존스턴, 리치 무어 감독)

  모든 성장 서사의 핵심은 ‘결핍의 인식과 극복’이다. 주먹왕 랄프 1(Wreck-It Ralph)의 경우는 “바넬로피의 ‘깜빡임’이나 랄프의 ‘파괴적 성향’은 결함(glitching)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의 질서를 바꿀 수 있는 영웅적 ‘비범함’이다” 정도의 비교적 명확한 주제 의식을 가지고 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공주 성장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형은 말할 필요도 없이 ‘가족’이다. 랄프 1 역시 공동체의 질서 밖을 맴도는 두 아웃사이더 랄프와 바넬로피가 일종의 대안가족을 형성하는 이야기로 결말을 맺는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새로운 대안가족의 탄생’이라기보다는 ‘랄프-바넬로피라는 유사가족에 대한 기존 공동체의 인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랄프-바넬로피라는 ‘유사 아버지-딸’은 리트왁 오락실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가족’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랄프 2(Ralph Breaks the Internet) 초반에 보이는 랄프-바넬로피 부녀는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해 보인다. 단 한 가지, 바넬로피가 반복되는 일상에서 일종의 권태를 느낀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그들의 일상은 너무 안정적이어서 이제는 바넬로피가 ‘깜빡’일 필요조차 없다. 랄프는 그런 삶이 영원히 반복되길 원한다. 그러나 바넬로피는 불안정하더라도 ‘깜빡’ 일 때만 온전하게 본인일 수 있다. 랄프가 이를 부정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랄프 스스로 이전 시리즈의 주제의식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랄프 2 서사의 표면적 목표는 부러진 ‘슈가 러시’의 ‘운전대’를 새로 구하는 것이다. 운전대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바넬로피가 자신을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어 줄 존재가 부재함을, 그리고 동시에 랄프는 그런 존재가 되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음을 의미한다. 유아적 단계에 있는 바넬로피의 좋은 친구가 되기에는 더할 나위 없지만, 바넬로피가 사회적 주체로 나아가는 데 있어 랄프는 도리어 장애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에 바넬로피는 랄프 1에서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결핍 즉, ‘어머니’라는 이름의 부재를 절감한다.


  사실 ‘슈가 러시’의 운전대가 부러진 것은 절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바넬로피는 필연적으로 오락실이라는 폐쇄적 공동체를 벗어나 모든 타자와 연결 가능성을 갖는 ‘인터넷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 불안정한 카오스의 세계는 말할 필요도 없이 인간 사회에 대한 은유이다. 유사-아버지인 랄프는 바넬로피가 주어진 퀘스트를 빠르게 수행하고 다시 오락실(가족 공동체)로 돌아가길 바란다. 그러나 바넬로피는 자신의 자리는 더 이상 오락실 게임 공동체가 아닌 ‘인터넷 세계(사회적 네트워크)’에 있음을 자각하고 이 매력적인 무질서 속에서 자신을 이끌 새로운 질서를 간구한다.


  이때 부모의 빈자리를 채우는 존재들이 바로 ‘섕크’와 ‘디즈니 공주 연대’이다. 우선, 정직한 방법으로 돈을 벌라고 충고하고 바넬로피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기를 장려하는 섕크의 모습은 명백한 ‘어머니’의 현현이다. 따라서 음소거된 랄프의 목소리를 섕크라는 초자아적 명령이 완벽하게 대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하다. 디즈니 공주 연대 역시 바넬로피의 ‘공주’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동시에 전통적인 가족 공동체와 파트너에게서 벗어날 때만 ‘공주’들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섕크’와 ‘공주 연대'를 만난 이후로 바넬로피는 아예 ‘운전대’의 존재는 잊어버린 듯한데, 이 역시 바넬로피가 진정으로 구하고자 했던 것은 ‘운전대’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환기시키는 ‘어머니’의 존재였다는 점을 방증한다.


    이제 바넬로피는 유사-아버지인 랄프의 품을 벗어나 당당하게 디즈니 공주 연대의 일원이 되었다. 바넬로피는 더 이상 ‘깜빡임’을 억제하며 애써 ‘안정된 상황’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바넬로피 자신의 능력으로 얻어낼 수 있다. ‘덩치 큰 남자’의 도움 없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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