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빛, 좋은 공기(2021)> 리뷰 (임흥순 감독)
색을 잃은 두 도시
<좋은 빛, 좋은 공기> 속 대부분의 장면에는 색이 존재하지 않는다. 색을 잃은 두 도시는 어떨 때는 순간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닮았다. 서로 다른 두 도시의 이야기는 자막이나 내레이션을 통해 명확하게 구분되지도 않는다. 영화 제목, 사건이 발생한 오월이라는 시기, 지금까지도 광장에 나서는 어머니들의 증언, 그리고 경계가 모호한 수많은 이미지들은 두 도시가 서로에게 마치 거울 이미지와도 같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재확인시켜준다. 그러나 한 도시의 아픔을 다른 도시의 아픔과 나란히 놓는 작업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두 아픔이 닮았다(≒)고 말할 때 등호 위아래의 점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어떤 이야기들은 놓쳐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한 점(・)에는 루이스 푸엔조 감독이 연출한 <오피셜 스토리(1985)>가 이미 고발한 바 있는 강제 입양 사건이 숨겨져 있다. (<좋은 빛, 좋은 공기>에서도 입양 당사자의 증언을 통해 해당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는 있으나 별다른 설명이 붙지 않아 영화만 보고는 무슨 사건인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아르헨티나의 수도이자 현재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부에노스아이레스와는 달리 광주는 다른 도시들의 발전 과정 속에서 공공연하게 차별되었던 도시라는 사실도 다른 한 점(・) 속에 숨어있는 이야기다.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고 계속해서 겹쳐지는 자연과 폐허의 모습들은 분명 서로 다른 두 아픔이 공유될 수 있는 지점을 마련하고 두 도시의 고유한 기억이 경계를 넘어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아픔의 병렬이 나에게 너무도 쉽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영화를 다 보고나니 조금은 마음에 걸렸다.
"생명이 존재하고 있구나"
올해 광주 비엔날레에 갔을 때 가장 감명 깊었던 전시공간은 국군수도병원이었다. 폐허가 된 병원 전체를 전시공간으로 활용하는 작품들은 정말이지 하나같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해당 공간이 그토록 강렬한 감각으로 다가왔던 것은 무엇보다도 폐허를 집어삼킬 듯이 자라고 있는 식물들 때문이었다. 유리창이 사라진 창 안으로 가지를 뻗은 나무는 마치 벽을 뚫고 자라는 듯했고 잡초들은 해가 들지 않는 응달에서도 무서울 정도로 파랗게 자라고 있었다. 이 공간의 아픔을 눈이 부시게 짙은 초록의 색으로 끝내 다 뒤덮어버리겠다는 무언의 의지가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직접 겪지 않은 아픔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조심스러운 부분은 역시나 섣부르게 치유나 회복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되는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상황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단단했을 벽, 바로 그 벽을 뚫고 맹렬하게 자라는 풀들을 보는 그 순간만큼은 ‘강인한 생명력’이라는 진부한 수사가 절절하게 와 닿았다. <좋은 빛, 좋은 공기>에서 증언들 사이를 움직이는 생명체들의 몽타주를 통해 감독이 얘기하고 싶었던 바도 결국은 그러한 생명력에 대한 게 아니었을까.
다른 위도에서 오월은 감미로운 밤들을 되찾는다
“다른 위도에서 오월은 감미로운 밤들을 되찾는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의 시인 후아나 비뇨치의 시집 『세상의 법, 당신의 법』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이다. 군부의 탄압을 피해 바르셀로나로 망명한 그에게 매년 찾아오는 오월은 아주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추적추적 내리는 지중해의 비”를 바라보며 떠올리기도 두려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街)’와 멀리 떨어져있음에 안도하기도 했을 것이고, 바르셀로나에 몸을 피하고 있는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먼 거리가 더 멀어질까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감미로운 밤들을 ‘되’찾는다고 말할 때 그의 마음은 언제나 그날의 밤에 향해 있었을 것이다. 만약 후아나 비뇨치가 또 하나의 ‘다른 위도’인 광주의 오월 역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그것만큼이나 아팠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아픔을 함께 이야기할 수 도시가 있으니 그나마 위로가 좀 됐을까. 아니면 대척점에 있는 두 도시가 슬픔의 얼굴마저 데칼코마니처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 가슴 아파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