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존 윌리엄스 저)를 읽고
요즘 보는 영상과 활자 사이 격차가 크다. 한창 내 유튜브 영상 목록에는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쇼츠 영상이 뜬다. 본편은 한 회도 못 봤는데, 알고리즘이 떠먹여 주는 대로 짧은 장면들을 순순히 누르다 보니, 어느덧 결말까지 꿰 버렸다. 어렸을 적부터 노년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가족을 꾸린 부부의 이야기. 보는 내내 따뜻하기만 한데, 읽는 활자에서는 찬바람이 휭휭하다. 장편소설 《스토너》를 읽으며 문체에 스민 쓸쓸함을 어느 구간에서도 피할 수 없었다.
'스토너'는 20세기 초 미국을 배경으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가정을 꾸리고, 종신 교수가 된 남성의 이름이다. 이렇게 줄여놓으면 입지전적인 인물로 보이지만, 작품에서는 그저 '성격이 팔자려니' 하며 살아온 사람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상황에 맞서기보다는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는 편을 택했다. 문학을 전공하게 됐을 때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고 교단에 남았을 때도, 아내와 가정을 꾸려가면서도 한결같이 그러했다.
한번은 동료 교수들과 학장에게 신망받는 대학원생의 박사 과정 면접을 진행하며, 스토너만 그 학생에게 불합격을 준 일이 있었다. 자신이 세운 합당한 원칙으로 질문을 던졌으나, 어느 답변도 성에 차지 않았던 것. 이로 인해 교직에 있은 대부분의 시간을 미움받으며 오랜 시간 신입생 기초 수업을 지정받게 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런가 하면, 한 대학원생과 불륜을 저지른 일을 아내와 학장에게 들키기도 한다. 아내는 (이상하게도) 이 일을 문제 삼거나 불쾌해하지 않았고, 학장은 상대였던 대학원생을 다른 학교로 보내도록 조치를 취한다. 그러면서도 대부분 자신의 감정과 행동의 당위성을 말하지 않는다. 묵묵히 상황에 따를 뿐이었다.
아내를 대하는 태도는 달랐지만, 스토너와 〈폭싹 속았수다〉의 관식(박해준 분)에게는 겹쳐 보이는 모습이 있다. 주관과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 견디는 것조차 티 나지 않는 사람. 정확히 말하면 '주변이 알아채기 어렵게 표현하고 버티는 사람'일 것이다. 미디어에서 흔히 그리는 아버지의 표상이기도 하다. 이런 성향이 도드라지면 외따로 보인다. 그러나 주변이 모두 알도록 마음 구석구석을 내비치고 스스로 견디는 상황을 낱낱이 고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정도는 다르지만 누구나 일정 수준의 고독을 안고 사는 격이다. 이렇게 보면 쓸쓸함은 인간 세상에서 숨처럼 당연한 생명 활동이 아닐까 싶다.
맞다, 당연히 쓸쓸할 것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내 주위에 움트는 표현과 인내를 기민하게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더욱더 감수성을 벼려서 또 다른 스토너와 관식을 살펴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