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시민의 혁명공간 광장, 광화문

조선왕조 500년부터 촛불혁명까지

by SeeREAL Life

#1.

우리는 세계 최고에 열광한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시작으로

방탄소년단의 세계적인 성황은

이젠 문화계를 넘어 사회전반으로 전염되어

“세계최대” 수식어를 또 어디다 붙일지

권력자들의 구미를 고민스럽게 한다.


그래서 일까. 롯데타워(555m)를 필두로

현대차빌딩(569m), 파크윈타워(333m),

여의도IFC(279m), 타워팰리스(264m)등



세계 랭킹(높이)의 빌딩을 벌써 5개나 가지게 될

글로벌(?) 마천루의 도시, 서울.


중구에는 무려 960m의 금융빌딩을 지으려다 무산되었다고 한다.
불행으로 생각해야 할지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지.


물론, 세계 최고의 자살률, 저출산률,
교통사고 사망자 등

말해야 입만 아픈 오명도 많지만

서울 도심에도 세계 최대의 분수인 청계천을
비롯하여
회자될 오명은 차고 넘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세계에서 가장 큰 중앙분리대.

광화문 광장이다.



#2.

광화문 광장의 모태인 육조거리는 정도전에 의해 설계된다.


1392년 개경에서 새로운 왕조를 연 이성계는
1394년 한양 천도를 결정하고 새로운 수도계획에 들어간다.


당시, 조선의 모든 기틀을

주례(周禮)와 성리학(性理學)을 기반으로 설계했던 정도전은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궁궐 앞에 조선도성에서 가장 큰 길, <육조거리>를 계획하고

조선왕조의 건업을 알린다.


육조(六曹)란 고려시대 주요국무를 처리하는 여섯 관부로 한양천도와 함께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가 광화문 앞으로 이전되면서
명실공히 조선시대 국무를 총괄하는 주요 중앙부처로 격상된 것.


이는 고려의 DNA를 조선으로 자연스럽게
이식한 정도전의 혜안이었다.


또한, 그는 육조거리 계획을 통해

왕권강화를 통한 중앙집권의 의지도 피력하는데


광화문을 기점으로

왼쪽에는 이조, 호조, 예조와

국정을 총괄하는 의정부, 한성부가

오른쪽에는 병조, 형조, 공조와

국방을 총괄하는 삼군부, 중추부, 사헌부를 기획했다.


이는 신하들의 하례위치인 근정전 품계석의 배치로

왕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문관(文官),

오른쪽에는 무관(武官)이 서있는 모양과 동일했다.



그렇게 정도전은 씨줄 낱줄 엮듯
왕실과 한양을 대언하는 주요 공간으로 육조거리를 설계해 갔다.



#3.

한반도의 자존심이었던 광화문은

사실, 다른 이름으로 불리웠다.


궁궐로 들어오는 네 개의 대문 중

가장 큰 대로를 가졌다는 의미에 사정문(四正門)으로.


세종 때 집현전 학사들은

“임금의 큰 덕으로 온 나라를 비춘다”는 뜻을 담아

광화문(光化門)의 이름을 진언한다.

그들은 그 공간가치와 힘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조선500년 염원으로

큰 빛이 비치는 문으로 굳건했던 광화문(光化門).


그래서일까?

광화문은 온갖 곡절과 수모의 역사를 견뎌야 했다.


임진왜란 때는 한양 초토화로 불태워졌고

일제강점기 때에는 풍수 흐름을 꺽고자

해체되어 동쪽으로 이동된다.



특히, 일제에게 1910년부터 경복궁이 뜯겨나가는 동안

광화문 자리엔 조선총독부 건물이 들어선다.

육조거리 이름도 “광화문통”으로 격하되어
왕의 위엄은 사라지고 일제침탈의 상징이 돼버린 것.


해방 후에도 총독부는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걸리며

미군청으로 주인만 바뀌었다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정식청사로 사용된다.


하지만 아니러니 하게도 그곳은

국기만 태극기였을 뿐

한반도 피착권력의 바로미터로 유용되기 시작한다.


이승만 초대대통령은 이 거리에서
외신들이 “왕인가” 할 정도로 생일자축 퍼레이드를 거행했고
박정희 취임을 시작으로 전두환 때까지
온갖 군부를 찬양하는 이벤트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그렇게 광화문거리는 한반도를 지배한 권력들의

등장과 위용을 뽐내기에 너무나 애정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권력자의 그림자는 현재에도 현현하다.



#4.

오세훈 시장은 디자인서울을 역점사업으로

광화문광장의 새로운 탄생을 제안한다.



청계천을 거쳐 경복궁과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확 트인 자연경관을 바라보면서
시민 여러분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광화문을 걸어다닐 수 있게 된다면,
서울의 브랜드 가치는 한 단계 높아질 것입니다.


당시, 깃발만 꽂아도 당선이라는

집권여당의 순항에도 불구하고

광화문광장의 재건 반대여론은 만만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교통체증이 만연했던 세종로를

16차로에서 10차로로 줄이고 그 중간에

폭 34미터의 광장을 만든다는 아이디어에

시민들은

많이들 어리둥절했다.

2009년 광화문광장 조감도


역사의 복원, 조망권 확보, 문화공간 창조로
멀쩡한 찻길을 없앤다??


이에 광화문광장의 조경을 설계했던 서안 소장은

한국의 역사성을 면면히 이어온 광화문 거리의
잠재력을 다시 살려내고, 흔들렸던 국가 중심축을 바로잡자고 설득한다.

조선시대의 육조거리는 단순도로 기능뿐만 아니라
동대와 서대 같은 무대가 있어 문화의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비워진 “광장”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근대화를 거치며 이곳은
닫힌 공간, 잘려진 공간으로 변했습니다.
광화문광장 설계의 핵심 목표는 바로
이 공간을 다시 열린 공간으로 만들어
우리 정체성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5.

다행히(?) 광화문광장은 2009년 6월 건립되어

오세훈식의 다양한 이벤트를 수행하게 된다.


파리에펠탑 이후 도심최초로 개최된 서울 스노우잼(2009 Seoul Snow Jam)


그 중 정수는
“스노우보드 FIS 빅에어 월드컵 대회”


도심에 스노우보드 대회를 여는 역발상으로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기는 했지만

수도 중심에 시민들을 관찰자로만 내모는

값비싼 전시행사를 운영하는 것이 옳은가의 여론과 쓴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이에 노회찬 국회의원은

이것은 서울시민을 위한 광장이라기보다는
전시행정을 위한 오세훈 시장의 장난감이다

라는 사이다를 날린다.


물론, 평창올림픽의 성공기원을 위해 2017년 여름 도로 한쪽을 봅슬레이 워터슬라이드로 바꾸며

박원순식 시민(?)공간으로 만드는 전시행정도 있었지만


당시, 시민이 배제된 거금의 서울홍보사업은

많은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는 이벤트를 덤으로 선사하였다.



#6.

개인적으로 오세훈의 가장 큰 이벤트로 꼽자면


역사상 처음으로
광화문 네거리 일대가 침수된 사건.


2010년 추석연휴의 폭우는

예년과 비교해 그리 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목격했다.

수도 서울의 중심부가 무릎까지 잠기는 걸.


물위에 떠있던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허망한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많은 전문가는 편을 가려가며

서울시민들의 눈과 귀를 다른 데로 돌리려 했지만

나는 잠시나마 선조들의 지혜를 느꼈다.

사실 그 많은 이론과 이유를 대지 않아도

선명하게 보여졌다.


우리들보다 오래 그 터를 지켰던

말 그대로 그 곳을 보호하던 가로수들이 뽑혀나가고


소위, 편리가 만들어 놓은 “문명의 이기”란 것들이
그 곳을 얼마나 보잘 것 없게 만들어 놓는가를.



#7.

그리고 정확히 4년 뒤 추석.

우리는 야만을 목도했다.



아직도 제대로 된 조사조차 하지 않는 정부의 부당함을

목숨을 건 단식으로 호소하는 세월호 유가족들 앞에서

애국자를 자처하며 치킨과 피자로 이른바 폭식난동을 부린 일베를.



게다가 지도층의 암묵적(?) 지원을 통해

어버이연합이니 엄마부대라는 가짜보수들의

납득할 수 없는 정신적 집단폭력의 역겨움을.


인간의 도리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나.
가족 잃은 슬픔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대체 할 짓인가


당시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노모의 한탄은

유가족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분노를 금치 못하게 하였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알아챘던 것일까?
자신의 방문 한 달 후에
이러한 비열한 일들이 세월호 가족들에게 닥칠 거라는 것을.


박근혜는 유민아빠의 면담을 번번히 거절했지만

프란체스코 교황은 그를 보려 거리로 뛰어 나왔다.


많은 대화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축복을 빌어주는 교황의 모습에

시민들은 많은 눈물과 환호의 응원을 보냈다.

유민아빠가 단식한지 34일이 되던 날이었다.



#8.

그 이후에도 그곳은

야만과 역겨움으로 얼룩져갔다.


그들을 몰아내자라며 한손엔 태극기와 한손에 성조기를든

애국(?)투사들의 참전은

세월호 가족들을 보호하자는 유모차부대까지 응전에 이끌더니



마침내 그 일이 터진 것이다.

박근혜-최순실게이트


가장 우호관계를 다졌던 중국과 미국의 언론들은

블루하우스가 샤머니즘 무당에게 조종당했다라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막장종교드라마를 전 세계에 퍼다 날랐다.

당시 국회에서도 회자된 뉴욕타임스 만평


어느 정치인의 말처럼 그녀의 패러디로도
우리의 허망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내가 이럴려고 국민했나 자괴감들고 괴로워.


아니 국민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아니 고통스러웠다.



이게 나라냐는 분노를 들고

광장으로 촛불을 들고 나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조차도


2016년 10월에 시작된 촛불혁명은

1천6백만명의 국민들과 함께

다음해 4월까지 이어진다.


그동안 박근혜는 탄핵되었고

재판관 전원일치로 대통령직 파면을 시작으로

2017년 3월 새벽 3시.

정식대통령으로서 구속된 두 번째 주인공이 되었다.

(노태우가 1호, 전두환은 체육관 대통령이다.)



국민이 승리한 것이다.



#9.

다시 서울시는 광화문 광장을 넓히겠다고 한다.

995억원을 들여 차선을 6차로로 줄이고

2021년까지 3.7배의 광장을 만들겠다고 한다.

2021년 광화문광장 조감도


광화문광장은 민주주의의 위기 때마다
시민이 나서서 민주주의를 구한 일상의 민주주의가 약동하는 곳이다.


박원순 시장은

광화문광장을 재구조화하는 이유를

국민승리의 유산을 일상의 맥락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전세계가 지켜봤다.

“국민이 나라다”를 외쳤던 광화문광장의 촛불혁명을

그리고 떨어진 국격을 새로이 쓰는

생동하는 시민역사를 목격했다.


그 강렬했던 염원을 담아

시민들의 토대(土臺)로 이 공간이 온전히 회복된다면

우리는 세계 어디에서도 전례가 없던

광장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유교적 왕조공간과 시민적 혁명공간이 공존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시민의 자부심을 품은 참여의 공간.


아직 절반만 갖춰진 한국의 심장공간을

새로이 건조할 최적의 때는 아마도 지금이 아닐까.



#10.

왜 집회를 이렇게 번잡스러운 광화문에서 할까??

그렇게들 강렬한 눈길을 끌고 싶어서일까?? 라는 물음으로

그 관종들의 집착을 찾으려

사실 광화문의 히스토리를 캐기 시작했다.


하지만 광화문광장은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위치적 효용보다 거대한 자부심으로

우리에게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의 역사이자, 대한민국의 상징이며
왕권을 대변하는 거리이자,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시민의 숨통, 광화문광장


김영삼 대통령의 중앙청 폭파는

국가 중심공간의 회복으로 연계되기에는

너무나 일회적 이벤트로 남았지만


자신의 집무실을 광화문으로 옮기겠다며

촛불혁명을 근간으로 광화문시대를 열자고 약속한

문재인대통령의 행보는

다음세대에게 어떻게 기억될지 기대해본다.



이제 광장을 넘어 시대로 엮는
광화문 이니셔티브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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