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어떻게 상처를 삼키는가
#1.
어릴쩍 나는 남영동에 살았다
그때 기억을 더듬으면 참 없이 먹었고
애뜻하게 살았다.
내 나이 82년생이지만 그때 그곳은 그랬다.
어머니는 그때를 추억하면
정말 고생 말도 못했지 라는 이야기와 함께
고정 레파토리가 시작된다.
일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냉장고가 텅 비었어.
앞에 전경들이 “목 마르다 배 고프다” 니깐
어린마음에 니가 다 퍼다 줘 가지구.
그랬다. 우리집은 남영동에서도
데모가 가장 많았던 미군부대 앞.
그곳엔 항상 전경들이 서 있었고
더운 여름에도 완전무장한 그들이 안쓰러웠는지
뭐라도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어린 내 눈에도.
#2.
영화 <1987>을 보니
나름 낭만졌던 그때가 떠올랐다.
나 역시도 그때 그사람들처럼
코코블럭 머리를 찰랑이며
남영동 골목을 누비고 다녔으니까.
그런데...
남영동에 끌려가고 싶어? 라는 윽박지름과
겁에 질린 의사선생님 그리고
물이 가득했던 대공분실을 보며
나름 건축을 전공한 자로서 불편한 심기가
삐쭉 올라왔다.
도대체 저런 지옥같은 방은
어떤 시정잡배가 만든거지
그도 그럴 것이 스크린 속 대공분실은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에 속수무책인 공간이었다.
공포와 울부짖음은 서라운딩 되지만
도무지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모르는.
듣고 싶어하는 걸 토해내야
겨우 기어나갈 수 있었던 피비린내의 3평 밀실.
머리를 받아도 자해 할 수 없고
낮과 밤인지만 구별되는 좁고 긴 창문.
마치 녹음실을 보는 것 같은 흡음재의 벽면.
빛도 책상도 어느 하나 움직일 수 없던
치밀한 설계는 지옥 같던 곳을 도시 속 섬으로
은폐시켰다.
끔찍했다. 내가 살던 그 곳에
저런 섬찟한 괴물이 있었다는게
#3.
<건축은 어떻게 아픔을 기억하는가>의 김명식 교수는
그 끔찍한 거수기로 활용된 건축가의 재능을 통탄하고 있다.
1976년 준공된 경찰청 치안본부 대공분실은
박정희의 명을 받아 당대 최고 건축가로 불렸던
김수근에 의해 지어진다.
5층에는 고문이 이루어졌던 15개의 조사실이 위치했는데
사람의 육체와 정신을 장악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설계는
당시에도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그 시작은 나선형 계단.
폭이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방향 감각을 잃게
될 즈음 5층의 비명 소리가 들리게 된다.
그렇게 공포는 피감자를 잠식하며
3평 남짓한 지옥의 공간이 시작되는 것이다.
외부에서도 눈에 잘 띄지 않게 계획되어 있다는 점.
고문 공간이 노출되지 않도록 파사드 비율이 세심하게 고안된 전체외관은
설계에서부터 그 용도가 세부적으로 주문되고
반영되었다는 것이 김명식 교수의 설명이다.
한국 근대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김수근.
그도 역시 권력 앞에 빌붙어야만 했던
거수기였단 말인가.
#4.
이태복, 김근태, 박종철 등 수많은 시민들이
거쳐갔던 그 고문실의 잉태자 김수근은
사실, 한국의 현대문화와 예술사를 새로 쓴 거장으로 불리운다.
특히, 문화와 예술의 경계를 허물었던 김수근은
건축을 중심으로 척박했던 한국 문화예술의 질서를 만들어냈고
한국건축의 새로운 동력을 이끈다.
남산자유센터, 세운상가 등을 통해
노출콘크리트 시대를 열고
마산 양덕성당, 서울 경동교회, 아르코 예술극장등으로
벽돌건축의 아름다움을 한국에 안착시켰던 그.
자신의 <공간사옥>을 거점으로
건축, 음악, 미술, 시각예술가들에게 예술 활동을 후원하고
종합예술문화잡지인 <공간> 발행으로
젊은 유능한 예술인들을 소개하고 지원했던 그는
국내를 넘어 이미 해외에서 인정받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이름조차 생소했던 타임지에
르네상스의 중심인물, 베네치아의 메디치가에 견주는 인물로
김수근. 그가 소개되었던 것.
마흔에 접어든 1977년 5월.
타임지는 그를 “서울의 로렌쵸”로 부르며
범태평양건축상을 수여한다.
피렌체의 문화예술을 풍요롭게한 메디치가의 대표적인 인물
바로 그 <로렌쵸>로 말이다.
#5.
수 많은 죄수들을 어떻게 숫자가 훨씬 적은
간수들로 통제가 가능할까?
무기를 들고 윽박지른다고 고분고분한 사람들이 아닐 텐데...
어른이 되고서야 알게 됐다.
사람을 굴복시키는 방법은 육체적 위해가 아닌
정신적 위협에 있다는 걸.
그것을 먼저 사유했던 것일까
공리주의를 탄생시킨 세기적인 철학자 제레미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논리로
<파놉티콘>을 고안해 낸다.
저비용 고효율로 죄수를 가두고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는 원형감옥.
파놉티콘의 기본형태는
중앙 감시탑과 그 주위를 동그랗게 배치된 감방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감시탑에는 강한 빛이 비춰 감방을 속속들이 보이지만
눈이 부신 죄수들은 간수를 볼 수 없다는 것이 핵심.
즉, 일방적으로 노출된 공간에서
“너희는 항상 감시받고 있어”라는 불안과 공포는
결국, 자기검열을 만들며
끊임없는 지배공포에 길들여진 복종이 내면화되는 것이다.
전체(Pan)를 본다(Opticon)은 판옵티콘은
이후 군대, 병원, 학교, 공장으로까지 확대되며
감시가 필요한 사회 전반으로 유용된다.
보이지 않게 지배하기 위해
독재정권의 권력에게 상정되어
건축은 그렇게 고통을 삼켜 나갔다.
#6.
2016년 6월
김수근의 30주기 추모전이 열렸다.
건축을 통한 역동적인 행적으로
우리시대 근대건축의 아버지로 불리며
천재적인 혜안을 이식했던 그.
하지만 그 어디에도
독재정권에 이용되어 기능인으로 살아간 흔적은 없다.
아니,
한국전쟁 중 탈영하여 일본으로 밀항했던 것.
당시 주요 국책사업인 종로3가 재개발과 여의도 도시계획이
독재시절 김종필의 후원아래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익히 들었던
대한민국 문화예술계의 거장만이 있었을 뿐.
2017년. 사람들은 남영동 대공분실을 마주하며
고문의 실체와 함께 기능적 악랄함에 소름을 느낀다.
그리고 그 잉태자가
거장 김수근이란 사실에 충격을 느끼며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철지난 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한다.
과연 그는 우리가 알던 한국건축의 아버지요,
르네상스의 로렌쵸가 맞기는 한 걸까?
#7.
단테가 드디어 지옥의 문에 당도하자
지옥도 거부한 처참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듣게 된다.
그는 안내자인 베르길리우스에게 묻는다.
지옥의 성문에도 못 들어가서 신음하는
저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안내자는 답한다.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소심하고 비겁한 자들, 죽은 채로 삶을 낭비한 자들입니다.
지옥의 세 번째 곡조에서 단테는
지옥 목전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최악의 인간들은
“비겁한 사람들”이라고 꼬집는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작가 엘리 위절 역시,
역사적 폭력성 앞에서 아무 태도를 보이지 않는 사람들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중립적인 행위자는
“최고의 악” 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나는 항상 침묵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8.
건축학개론의 첫 장.
건축은 삶을 담는 그릇이다.
하지만 그릇에 삶을 담기엔
지식인의 양심보다는 기능인의 탁월이
한국사회 아니 우리네 인생에는
더 중요한지 모르겠다.
칼이 살인사건에 사용된다고
칼을 만든 사람이 모든 죄악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이나마이트를 고안한 노벨은
자신의 연구가 편리가 아닌 전쟁으로 오용되는 것을 마주하곤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수많은 젊음을 살상하는 도구가
자신의 다이너마이트라는 것을 고뇌하며
노벨상으로라도 세상을 더 선하게 변화시키길
지옥을 설계한 것이 죄악이라고
비난하거나 혹은 면죄부를 주자고
두둔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한국에서는 훈장을 받는 이도
세계에서 인정받는 최고 엘리트도
자신의 양심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의 기능인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챈 나 역시,
단테가 그린 지옥문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비겁한 사람이 되지 않길 바랄 뿐.
#9.
사실 여부를 알 길은 없으나
김수근이 <공간>을 통해 문화예술의 명맥을 이으려고 한 것은
행여 사회를 더 나은 공간으로 바꾸려고 한
지식인으로의 양심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인터뷰를 마주하고 나서는
1986년 5월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스승님께서 저와 다른 선배 한 분을 부르시더군요.
그리고 너희가 회사를 맡아라고 유언을 하셨어요.
꼼짝없이 당했죠. 대표이사가 되고 보니 빚이 30억이 있었어요.
사실, 김수근 선생 작고 몇 년 전부터
저를 비롯해 많은 직원들이 월급을 제대로 못 받고 있었죠.
전두환 정권이 ‘구악’을 척결한다면서
김수근 선생 같은 대표적인 문화지식인들을
정부 발주 프로젝트에서 제외시키고 설계 당선까지 방해했거든요.
- 건축가 승효상 -
호의호식했을 거수기라는 예상과 달리
정권의 탄압하에서도 자신의 길을 온전히 걷고 있었던 김수근.
그 어려움 속에서도
<공간>의 생명을 놓지 않으려던 그는
필연적으로 어두운 자화상을 가진 한국의 엘리트가 아닌
선한 가치를 이루려 침묵하지 않는
양심을 가진 건축인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아니 우리가 익히 알아 왔던
"서울의 로렌쵸"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