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역과 남산 그리고 조선신궁

청산해야 할 일제의 문화통치와 조선신궁 히스토리

by SeeREAL Life

#1.

이렇게 해맑게 웃으며 경성을 누빌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댄디힌 패션에 한 껏 멋을 부린 이들.


2008년 10월에 개봉된 모던보이는

1930년대 경성에서 시작된 신식 도시문화를

선보이며 흑백사진 같던 조선 식민지도

지금과 다르지 않게 신 유행과 패션을 뽐내는

젊음이들 있다는 새로운 관점을 선사해 준다.


커피를 마시고 축음기로 재즈를 들으며

양장옷으로 자신의 개성을 추구하는

신식 남녀들이 거리를 활보하던 경성은


백화점, 카페, 레스토랑과 같은 소비 공간이

도시의 핵심공간으로 채워지며


조선의 변화를 알리고 있었다.




#2.

양복과 백구두의 모던보이와

단발과 양장의 모던걸들은


타인에 시선에 의식하지 않는

대담한 언사와 행동들로

아직도 유교적에 사상에 머물러 있던
조선 땅에 큰 파문을 던지기도 했다.


어찌보면 그들은 조선에 출현한

전혀 다른 종이기도 했다.


태어나보니 나라가 뺏겨있었고

도시를 기반으로 소비의 장이 열리며

개항과 함께 생경한 해외의 문화들이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는 세대.


그렇기에 신문물이라는 것에 대한

고루한 적개심이나 두려움 따위가 아닌


소비문화 속 트랜드세터가 되어

자신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라는

기존과 전혀 다른 경성시민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가고 있던 것.


그리고 일제는 그 점을 간파하며

교묘하게 당근을 쥐어주고 있었다.


바로, 조선 점령전략 두번째

[문화통치] 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3.

1919년 8월

조선총독부의 3대 총독이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


그는 부임한지 한달이 채 되지않아

대대적인 시정 방침을 바꾸는데


가장 눈에 띄는 지점은

헌병경찰제도의 폐지와 조선인 관리의 임용,

언론과 집회의 허가와 조선의 문화와 관습 존중.


즉, 그동안의 폭압적인

헌병경찰의 무단통치에서 벗어나

조선인을 신식인으로 가르쳐


함께 번영을 이루겠다는 [문화통치]의 시작이자

유화책을 기반으로 정신을 말살시키겠다는 전조의 서막이었다.



총칼 앞에서도 맨주먹으로 나가

대한독립을 외쳤던 1919년 3.1운동은

무단통치가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틀어막지 못한다는 그 한계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런 연유로 일제 내부에서도 새로운 방향으로
조선 통치전략의 변화가 시급했는데


이 새로운 국면을 돌파할 적임자로 지명된 이가

미국 유학파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 해군 대장이었던 것이다.


그의 시정 연설에는

문화라는 사탕발림 아래 민족분열을 만들어 갔던

조선통치의 새 방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총칼로 지배하는 것은 그 순간의 효과 밖에 없다.
남을 지배하려면 철학과 종교, 문화를 앞장세워
정신을 지배해야 한다. 그들을 세뇌시켜야 한다.
이것이 나의 문화정책이다.



#4.

문화통치의 정수는 경성역 건립이었다.


그의 부임 3년 만에 착공된 경성역은

도쿄 역사를 설계했던 다쓰노 긴고의 제자인

도쿄대학의 교수 쓰카모토 야스시가

직접 설계하였는데


동양 제1역은 도쿄역, 동양 제 2역은 경성역으로 기획하며

지하1층, 지상2층의 당시 초대형 건축물로 건립된다.



최근, 한국건축계는 서울 역사는 도쿄 역사를 본 딴 것이 아닌 스위스 루체른 역사를 모델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본 - 부산-조선-만주]를 잇는

국제적 수준의 역사로 기획된 경성역은


이후,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연결되어

모스크바와 베를린까지 연결시키는

세계적인 교통 요충지로 떠오르게 된다.



#5.

사실, 경성역을 잉태시킨 경인철도는

고종의 대한제국이 심혈을 기울이며

1900년에 진행하였던

[근대국가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기존, 조선의 외교 루트였던

[남대문-의주-북경]을 대신해

[경성역-인천항]을 통해 미국을 비롯한

서구와의 원활한 교류를 위해 건설된


신외교 정책을 실현시키는 철길이자

신문물 교류의 심장부였던 것.


1882년 미국과 수교이후 이듬해

미국에게 인천항을 개항한 조선은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회사에서 담당시켰고

기차 역시 미국산 모굴탱크형 기관차를 사용한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영국등과의

활발한 외교적 교류를 위해

당시 대한제국이 위치한 경복궁 주변 정동에

공사관 입지와 외국인촌을 허락하여


서구열강과 대한제국의

정동 외교타운시대를 열어간 것이다.


하지만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

경인철도 부설권 역시 일본인에게 넘어가면서

경인철도와 함께 경성역은


외교와 신문물을 위한 수단이 아닌

침탈과 수탈의 상징으로 전락되고 만다.



#6.

1925년 완공된 경성역은

일본 근대문화의 우월성을 알리는

또다른 선전물로도 사용되어 지는데


특히, 조선에서 볼 수 없었던
큰 원형돔과 비잔틴양식의 공간을 선보이며

[문명화된 일본을 통해 근대화 된 조선]이라는 프레임으로

일제의 지배를 정당화 해간다.


또한, 의도적으로 한양 도성을 부숴가며

같은 해에 완공된 경성운동장의 건립은

(지금의 동대문운동장이자 도시톡톡 1편에서도 소개)


일본 위주의 스포츠 행사를 통해

3.1운동으로 달궈진 민족의 자존심을

교묘하게 무너트리는 대회로 운영된다.


무엇보다 경성역의 완공식에 맞춰

일본이 벼르고 벼려가며 완성한

숙원사업이 있었으니


한양 풍수지리를 이루고

조선인들에게 민족의 자존심이자

정기로 생각하는 남산터 위에

그것도 한양도성을 모두 부수고 만든


일본의 천황을 섬기는 [조선신궁]이었다.



#7.

일제는 조선 내 3·1운동의 여파를

잠재우는 방법 가장 첫번째로 손꼽은 것이

조선신궁 건립이었다.


국토뿐만 아니라 그 민족정신까지 말살시켜

황국시민화하겠다는 일제의 획책이었던 것.


일제는 1919년 3·1운동 이후

4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7월 18일 일본 내각을 통해

경성 내 조선신궁 건립에 박차를 가한다.


특히, 도쿄대학 이토교수의 설계로

경성 내 시각적 효과와 위용을 최대한 드러낼 수 있도록

신궁의 위치와 건물배치를 선정했는데


경성역 앞에 있을뿐만 아니라

경성 전역에서 보이는 남산은

식민지배의 상징물이 들어서기에는

너무나도 안성맞춤인 지역이었다.


뿐만아니라 조선신궁의 신작로는

남대문까지 이어져 혼마찌와 남산주변에

살고 있던 다수의 일본인들에게

정신적인 안녕을 충족하기에도 요긴한


말그대로 경성 내 가장 중요한 지역이자

전략적인 요충지 였다.


조선신궁 주변 혼마찌를 비롯한 일본인 거주지는 광복이후
이순신의 기개로 그 정기를 누르겠다는 의도로 "충무로"라는 지명을 사용하게 된다.



#8.

1925년 경성역 건립을 축하하는 첫 열차로

일본 도쿄에 있는 천황의 사리를 가져와

조선신궁을 완성한 일제는


조선총독인 사이토 마코토의 신사참배 이후

일왕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으로 말들기 위한

민족정신 말살정책을 취한다.


특히, 1936년에는 신사규칙을 개정하여

조선인들의 신사참배를 의무화 시켰으며

이를 통해 노골적으로 신사참배를 동원시킨다.



단골동원 대상이었던 학생들에게는

신사참배 뿐만아니라 창씨개명을 강요했고

수업시간 역시 한글이 아닌 일본어로 수업을 하며

민족의 말과 언어 그리고 정신까지 침탈하기 시작한다.

또한, 1940년에는

일본황실의 2,600년을 맞이하여

경기도 전역에 있는 3만여 아동에게

조선신궁의 도장이 찍힌 엽서를 나누어주며

신사참배의 정당성을 알리기도 했다.


조선 내 신사 역시 조선신궁의 건립이후

전국적으로 급격하게 늘어갔는데

1945년 광복까지 전국에 1,000여개의 신사가 세워졌다고 하니

일제가 진행한 민족정신 말살의 시도는


너무나 가혹했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신궁은 일왕에 충성하는 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종교적 공간이자 이데올로기적 장치였다.
사진에 보이는 조선총독인 사이토 마코토의 신사참배 이후 조선인을 향한 신사참배는
더욱 노골적으로 강요되었다.



#9.

1945년 8월 15일 광복은

20여년이 넘게 조선 각지에서 이루어진

정신적 세뇌와 폭력의 억압을 끊어낸다.


조선 내 암세포처럼 퍼저버린 신사는

모두 불태워지거나 부셔져버렸는데


일본황실을 상징했던 조선신궁은

일본인만의 전소절차에 따라 사라져간다.


8월 16일 승신식(昇神式)을 치르고

24일 비행기편을 통해 신물(神物)을 도쿄에 반납한 이후

일본인 스스로 신궁 하나하나를 해체하여

10월 7일 전소시켜 버린 것.


일제의 정신말살 연대기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폐허로 남겨진 남산은

이후 출현한 이승만정부, 군부독재, 문민정부의 시간을 거치면서

민족의 정기를 세우고 안녕을 기원하는 공간으로

다시 돌아온다.


신사가 있던 황국신민화의 교육장은

백범광장과 남산도서관, 안중근 기념관으로 대체되었고

김구 선생와 이시영 초대부통령, 안중근의사의 동상이 자리하여

민족의 정기를 살린 국민영웅들을 기리고 있다.


또한,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로

스스로 학교를 폐쇄했던 미션스쿨 가운데

미국 북 장로 선교회가 운영했던 숭의여학교는


그 주변에 터를 잡아

현재, 숭의여자대학교로 발전되어

크리스천 가치관 기반 전문 여성인력을 길러내는

명문사학으로 운영되고 있다.



#10.

2019년 8월.

올해로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남산이 위치한 서울 중구에는

국민정서를 대언하는 깃발이 꽂힌다.


[NO JAPAN]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


일본 자체에 보이콧 하는 것은 국제질서와 정서상 문제가 될 수는 있겠지만 아직도 한국과 주변을
일제치하의 점령국으로 인식하는 식민사관 앞에 어떤 대우로 그들을 대해야할지 고민이다.


조선침탈과 유린의 원흉이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피를 그대로 물려 받으신

자민당의 아베와 그 무리들은


100년 전 일제식민사관 그대로의 야욕을 내비치며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일방적으로 제외시키며

무역보복이라는 카드로 한국경제를 굴복시키려는

무력투쟁 중이다.


100년이 지난 지금

위안부문제, 강제직용문제, 독도침탈 문제에 대해

일언의 사과조차 하지 않은 채


방사능 오염수를 태평양에 방류한다거나

2020년 올림픽 참가 선수들에게

후쿠시마산 농산물을 먹이겠다는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무례한 행태를 일쌈는 그들에게


이웃국가로서 어떤 젠틀함으로 그들을 대해야 할지

난감함과 궁금증이 올라온다.



2019년 8월 프랑스 파리 시장 후보인 다니엘 시모넷과 시민운동가 프레데릭 비알레는
"도쿄 방사능 올림픽은 안 된다"는 현수막으로 도쿄시민들과 신주쿠에서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나라를 팔아서 부를 축적한 이완용의

재산환수 문제조차 100년을 끌고 있는 상황을 볼 때마다


사법부와 사회지도층에 대한

사회정의 실현에 관심이 있으신지 심심한 유감을 전한다.



대한의 독립열망을 외쳤던

3.1운동이 100년이 지난 지금

경성역과 남산이 품은 아픔의 역사를


이제는 끝내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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