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첩된 세계관의 공간, 시청과 정동 사이

궁궐, 유럽왕실, 로마네스크, 식민지건축, 커튼월

by SeeREAL Life

#1.
가끔 감사하게도
도시에 대한 글을 쓰는 걸 어디서 아셨는지...
"어디에 가면 한국을 느낄 수 있어요?"
라고 물으신다.

물론, 나의 개.취.를 기반으로
어디 어디를 가세요 추천해 드리지만

가끔 외국분일 경우에는
미로속에서 루비를 핀셋으로 골라내듯
정말 머리통을 굴리고 굴려
반짝 반짝한 공간을 발굴해낸다.

덕분에 만족도는 상향곡선이기는 하나
초기 고객들이 다음 추천으로
"한국인들도 잘 모르는 보물같은 곳을
알려달라"고 할 때는

높아진 만족도에
더 까다로워진 난이도에


미로 속 핀셋이 마이크로 집게로

강제소환 되는 것 같은 부담감에


난...나름...도시 이야기를 꼬불 꼬불 적는 사람이잖아 를 되뇌이며


음..너희 동네는 너희들이 모르는
반짝이는 공간이 있기는 하니 ??라는
뽀료퉁이 올라오곤 한다.



#2.
뒤돌아 보면
참 반짝이는 공간이 많았다.


동네 사람들이 슬리퍼를 끌던 세로수길서 부터
매니아들만 거닐던 경리단길과 계단장의 이태원.
있는지도 몰랐던 서촌의 한옥 갤러리들과
아티스트의 새 쉼터 망원동 카페들까지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들 모두
차, 사람, 강아지가 북쩍이는 핫플레이스가 됐다.
동시에 나 같은 <한적최애자>는 떠나게 되었고.

그런 서울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파트가 콩나물처럼 올라가야 발전하는 동네고

아직도 아파트 높이 규제 푸는게 지역발전이라고
주장하는 동네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한국사람들도 모르는
한국아이덴티티 공간이라니...


그래서 그들의 눈으로

잠시 서울을 낯설게 봤더랬다.



수도가 산 밑에 있음에 놀라고

도시를 가로지르는 푸른 강을 부러워하며

정신없는 네온싸인과 정리되지 않은 빌딩의

다양한 컨텍스트를 흥미로워 하는


그 자극적인 빌딩 숲사이로

고즈넉한 궁궐과 한옥들이 소소히 생동하는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 도시.


그래서인지 한국 배경의 영화들은

한때 들썩였던 홍콩의 뒷거리처럼

서울을 그려 놓았다.


자극적인 네온사인과 빌딩, 그리고 시장통이 버무려진 모습의 서울
- 영화 [다운사이징] -


모습에 그들이 느끼고 싶은 서울의

다이나믹한 비밀 공간이 어디일지 더듬어 본다.


그리고 얼마 전 거닐던 뒷 골목에서

비슷한 걸 찾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한국인들도 잘 모르는

다이나믹한 공간을


#3.

내 자식이기는 하지만 내 자식이 아니다

갑자기 난데 없는 기자회견으로

사생아가 된 녀석.

다름 아닌 2012년에 태어난 <서울 신청사>.


네 광장에 사흘동안
기뻐 울부 짖었다
네 거리에서 춤추고
네 골목에서 날 새우며 사랑하였다
너는 조국의 긍지
너는 나 자신의 명예


박원순 시장은 2012년 신청사 개청식에서

고은님의 <서울의 내일>을 낭독하며

그 감회와 희망을 전했다.


하지만 다음 이어진

그의 아버지, 건축가 유걸의 커밍아웃은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내 자식이기는 하지만 내 자식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가림막을 벗고 드러낸 모습은
익히 시민들에게 선전된 위용이

전혀 아니었다.


쓰나미를 닮았다는 둥 메뚜기라는 둥

터져나온 그 둔탁한 실망감은

심겨진 기대만큼이나 허탈함으로 뒤덮였다.

처마를 본 떴다고 하기에는 그 존재를 의심케 하는
그야말로 괴상하고 격이 낮은 디자인



#4.

서울 신청사는 오세훈시장 시절.

새로운 서울의 아이덴티티가 되겠다며

2008년 한국의 최고건축가 4명을 모신

지명 공모로 진행된다.


그것도 그럴 것이 수도의 상징인 시청을

식민지시대 지어진 일제 경성부청사를 보수해서

여태껏 써왔던 서울로서는


시대적 선언이 필요했던 것.

1926년 건립당시 일제 경성부 모습


게다가 2002년 월드컵 응원의 힘은

임시 광장의 서울광장을

명실상부 시민들의 상설공간으로

자리잡게 했다.


오세훈 시장은 그런 국민적 인식과

천만서울의 시작을 온전히 담는

국민적 모티브가 필요했던 것.


하지만 문제는

시공사인 삼성물산이 모든 키를 집어든

"턴키(Turn Key)" 건설방식으로 인해


설계자 유걸이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신청사 건립과정에 참여하게 된 건축가 유걸


유걸은 자기 자식을 되찾고자

2011년 "토털 디자인 마스터플래너"라는

걸출(?)한 이름으로 참여하게 되었으나

신청사가 건립되는 7년 동안 그가 컨트롤 할 수 있던

꼭대기 태평홀 밖에 없었다.


그 결과,

건축가 100명이 뽑은 최악의 현대건축물 1위 이자

외국인들도 잠자리를 연상케 하는 걸작으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5.

온실을 보는 듯한 답답함과 함께

쇳소리 가득한 집회스피커 소음


그 앞을 지나려다 발길을 돌린다.


외면하고 싶은 도시의 번잡함에

"아...제발" 을 되뇌이며 지쳐갈때 쯤


그곳을 향한다.


도시 속 오아시스 같이

고요를 되찾을 수 있는 공간.


타임머신을 타는 듯 단 몇걸음으로도
안정감을 선사하는 도심 속 공간
성공회 서울성당 이다.



대학시절. 음악소리를 따라걷다 마주친 이곳은

피렌체에서나 볼 수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을 가진

특별한 성당.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생소했던

영국 건축가에 의해 건립된

대한민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은



한국의 모습을 따른 기와지붕과 함께

로마네스크 아치형태의 창문과 문을 통해

동서양의 묘한 조화를 품고 있는

세계 유일한 공간 이다.


당시 <조선 성공회> 3대 주교인 마크 트롤로프가

영국인 아서 딕슨에게 설계를 의뢰해 1926년에 세워진 이곳은


1891년, 처음 한옥 성당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무려 127년의 세월을 품고 있는 셈.


게다가 전두환 독재시절

6월 항쟁이 시작된 역사적인 곳이기도 한 이 곳은


일제강점기부터 6.25, 민주화, 한강기적까지

서울 현대사의 한복판을 견뎌냈다는 점에서


서울시 유형문화재 35호로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나를 가장 잡아끄는 건

단 몇걸음으로 번잡한 속세를 끊는
사색의 고요함을 준다는 것.


그래서인지

명동의 뾰족한 고딕 성당보다

정동의 뭉뚱거리는 로마네스크 외관에


왠지 모를 친숙함이 느껴진다.



#6.

성당의 뒷쪽을 거닐고 있노라면

고즈넉한 한옥 한채가 보인다.


그리고 기와 위에 보이는 하얀용머리!?


용머리는 최고위 양반집에도 올릴수 없는

왕가와 궁궐, 국가건축의 상징으로


당시 성은이 아닌 이상

무단으로 용머리를 올리게 되면

왕실모독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왜 왕가의 한옥이 성당 뒤에 있을까?



궁금하던 차에

나이지긋한 자원봉사자 분이 오시더니

친절하게 설명해 주신다.


왕의 거처였던 덕수궁에서 옮겨진 건물이라고.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 이곳으로 옮겨졌다며

집 이름도 <양이재>라고 했다.


'몸을 수양하고 마음을 온화하게 하는 공간' <양이재>는

원래는 구한말까지 덕수궁을 지키며

황족을 교육하던 곳.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도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양이재는1904년 대화재로

덕수궁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지은 건물로


황실 건축의 마지막 형태를 가늠케하는

한국건축사에서도 역사적 의미를 가진 건물이다.


하지만 8 뒤, 대한성공회가 임하였다가

또 8년 뒤, 매입한 후 이곳에 옮겨져

성공회 서울 교구장에 집무실로 사되었다는 녀석.


아니 어떻게 황족의 건물을 외국인이 사용하고

나중엔 이전까지 시켜 소유할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이 올라 올때쯤


뒤 편에 위치한 영국대사관을 보고는

'아.. 그렇구나'

라는 외마디 깨달음이 올라 온다.


당시, 세계정세를 이끌던 초강대국 영국.


그리고 영국을 상징하는 성공회 교회는

영국 대사관의 소리없는 과시로

그 존재적 상징성이 강했다.


또한, 일본과 대립각을 세우던 일제강점기 초기. 왕족의 건물을 소유한다는 것은
명확히 대영제국의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는

더할나위 없는 좋은 소재였을 터...


지금도 성당과 덕수궁 옆에는
그때 자리잡았던 영국대사관이 그대로 자리잡고 있다.



#7

아관(러시아 한자명) + 파천(피난)

고종이 경복궁을 탈출(?)해서 러시아로 정치적 망명을 한 것을 말한다.


경복궁을 탈출했다 는 표현은

1894년 경복궁 왜란과 이듬해 명성황후 시해로

사실상 조선이 정치적으로 사망하고


일본 포위로 인해

고종은 궁에서만 칩거하는 포로로

유폐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1896년 2월 고종은

추운 겨울 그 엄혹한 포위망을 뚫고

일본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러시아로 망명길에 오르게 된 것.

경운궁에서 본 구 러시아 공사관의 모습


물론, 일본앞잡이들과 친일파들의

거센 환궁 앞력으로

더이상 러시아 대사관에서 있을 수 없었던 고종은


제 2의 망명지가 필요했다.

안전이 보장되고 자주적으로 일제에 항거할 수 있는

한양도성 내 독립된 공간.


고종은 120년 동안 비어 있던 경운궁으로 향한다.


우방이라 믿었던 러시아 대사관과

초강대국 영국 대사관이 주변에 위치한

오늘날 우리가 덕수궁이라고 부르는.


그러나 치외법권이었던 러시아 대사관과 달리

경운궁은 일본의 배가된 위험에
말 그대로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게다가 경복궁보다 훨씬 작은 규모로 인해

궁궐 내 안전문제는 무엇보다 리스크가 컷다.


이에 고종은 러시아 수비대의 지원과

국제법을 통한 안전보장 등 각종 안전장치 마련으로

일제의 겁박을 막을 수 있는

<제2의 치외 법권지>를 만들게 된다.


그렇게 1년의 망명 이후 디뎠던 경운궁은
1897년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그 시작을 열어 젖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제2차 망명정부’는

22년 후 거국적으로 일어난 1919년 3·1운동과

같은 해 4월 상하이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다.


조선에 있었지만

조선에 있지 않은

대한제국의 시작 경.운.궁.



#8.

덕수궁은 원래 조선9대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개인 사택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 중건으로

임금이 처음 머물며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다


"나라의 좋은 경사가 움직이는 궁"이라는 뜻으로
광해군은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하지만 경복궁 재건이 완료되고

비원으로 아름답기로 소문난 창덕궁이 중건되자

빈 궁궐로 남게 된 경운궁은


그렇게 120년이 흘러
대한제국의 정궁으로 그 역사가 시작된다.


경운궁은 그 우여곡절의 스토리만큼
고종의 다양한 시도와 실험으로 가득했다.


대한제국은 에디슨 전등 발명 이후 8년 만에 경운궁에 전기불을 밝혔고

고종의 출자와 미국의 기술이 접목된

최초의 글로벌 전력기업 ‘한성전기’가 탄생된다.


또한 경운궁 내에서는 그동안 조선왕조에서
찾아보기 힘든 시도가 진행하는데


그 중 하나가 석조전 건축이었다.


사실, 나 역시 처음 석조전에 봤을 때
'아니 궁궐에 왠 신전이야'
'미술전 때문에 지어진 모델하우스인가'라며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이 가득하다.


석조전은 1910년 대한제국이 13년이 되던 해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집무실로 축조된다.


이는 영국인 하딩이 설계한 18세기 유럽궁궐건축으로

한국최초의 서양 건축물이자

지금까지도 유일무이한 건축물.



신전을 방불케하는 3층의 대형 석조전은

영친왕도 함께 기거했을뿐만 아니라

1919년 고종이 승하하기까지


삶의 터전을 삼았던 곳이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한 근대식 정자 <정관헌>과

조선 최초의 샹들리제가 꾸며진 <덕홍전>까지


근대의 힘을 과감히 도입하며

황국의 영향력을 새로이 만들려는

고종의 다양한 노력들이 서려 있다.



#9.

덕수궁의 덕수는

고정황제에게 내려진 '칭호' 였다.


'왕에서 물러난 자가 덕을 누리면서 오래오래 살라'는


하지만 이 칭호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며

조롱섞인 위협으로 일제가 붙여줬다는 것에

그 아픔이 있다.


1906년 헤이그특사는

<만국평화회의> 주최자인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가

극비리에 보낸 <초청장>으로 부터 시작된다.


고종은 경운궁에서

일제의 폭압을 호소하고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었다.


이를 알게된 러시아 황제는

국제사회에 호소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


이에 고종은 일본만행을 고발하는 친서와 함께

이준을 비롯한 3명을 특사로 파견한다.


하지만 고종의 특사는

일본의 조직적 방해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이준의 할복으로 그 한탄스러움만 남기게 된다.


그리고 이 일이 있은 후 일제는

가만두지 않겠다며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그 자리에 앉히게 된다.


어거지로 군대해산령까지 내리며
대한제국은 무력화시키는 일제


이후 고종은 순종을 창덕궁으로 보내고

계속 이곳에 머물게 되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덕수하는 임금의 거처'

<덕수궁>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10.

111년만의 폭염으로 연일 신기록을 달성하는
2018년 8월
122년만의 고종의 길이 개방된다고 한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미스터션샤인> 속 이병헌은
고종의 비자금을 쫒기 시작한다

다행히 미스터선샤인의 고종은
나라를 새로 중건하려는 인물로 그려지는 듯하다


덕수궁 앞을 걷노라면
고종의 애환과 함께
조선과 근대, 현대를 관통하는

격정의 한국이 보인다.


익히들어 외면하고 싶거나

오해로 눈을 감아버리거나

경제 논리에 황망해지는


이를 반영하듯 이 곳은

한국에서도 가장 다이나믹한 건축의 장으로

자기만의 세계관을 켜켜히 채워가고 있다.


궁궐, 유럽왕실, 로마네스크, 식민지건축, 커튼월로 이어지며


하지만 그 사이의 오픈공간은

아직까지도 끊이지 않는 당동벌이로

시비와 곡직을 가리지 않는 설전의 지역.


어쩌면 한국인으로서도

혀를 차는 공간일 수 있겠지만


어찌보면 급속한 사회변화에 외면된

자신의 신념을 찾아보고자 하는

사회적 몸부림의 공간이 아닐런지...



#11.

맞은편에 보이는 시청 광장을 보며

2002년의 기억들을 떠올려본다.


눈에 보이는 모두가 붉은 티를 입고
신나게 Be the reds를 연호했던 시절


대한민국을 당당하게 외치며

처음 모두가 느꼈던

함께라는 강렬함과 공동체적 신선함은


아..이래서 일제가 우리민족을

당파라는 이분법의 색안경을 씌워

갈갈이 찢으려는 거였구나 라는

힌트를 심어준 순간이었다.


희망하기는

그 하나된 에너지가 기억의 자산이되어

무조배척의 사회가 아닌


뜨거운 축제같은 세계관으로

삶을 채워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 글을 쓰며

"어떻게 사는 게 희망의 조약돌을 만지며

사는 걸까..."

생각했더란다.


어제, 노동자의 친구이자

한국 민주주의의 돈키호테 같았던

한 정치인의 마지막을 보며


우리의 가야 할 길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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