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동대문 이야기
#1.
2014년 3월. 동대문 디지털 프라자가 개관을 앞두고 펜스를 걷었단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동대문...갑자기 ‘녀석은 어떻게 생겼을까’라는 궁금함에 발동이 걸려
버스에 몸을 실어본다. 그리곤 터덜거리는 버스차창으로 <환유의 풍경>이라고 불리우는
차가운 쇠껍데기들이 보인다.
기대도 안했지만 역시...라는 개운치 안는 뒷맛과 함께 들뜬 모습은 전혀 없는 그저 을씨년 스럽기만한 거리.그나마 DDP를 조롱하던 낙서들이 사라진게... 위안이랄까?
대중에게도 생소하고 건축가들 사이에서나 알려진 여류작가 하디드가 와선 한국의 향내를 풍기듯 “환유”라고 이름붙인 저 녀석. 그런데 궁금한 건
“무엇을” 환유한다는 것일까?
환유하기 위해서는 실재하지 않는 것이 필요할 진데...
혹시 이 자리가 알려지지 않은 기억들로 점철되어있다는 것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걸까?
#2.
2002년 관광특구 지정과 함께 우후죽순 들어선 빌딩들.
그리고 그 녀석들 사이로 펼쳐진 동대문 상권의 춘추전국.
초반 두타와 밀리오레와 터줏대감을 자처하고 오른팔 케레스타와 함께 동대문 철옹성으로 군림하더니,
지하철과 연결된 알짜자리에 헬로 에이피엠과 동대문 상인들의 피눈물으로 짜 올려진 굿모닝시티가 대항군처럼 등장한다.
최근에는 급기야 유통계의 큰손 롯데그룹까지 피트인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하며
이 전쟁터의 한축을 점령하려 나섰다.
그리고 이 모두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고
기대를 한 몸에 받고 등판을 준비하고 있는 구원투수 환.유.
이를 반증하듯 부동산 아줌마들은
“그래도 DDP가 문을 열면 관광객이 몰려들거니 한시름 놓을 수 있을거야” 라고 환심을 사려하지만
지금도 매장 수가 4만개에 육박한다는 물량 전쟁터에서 환유라는 녀석 하나만으로
<손님뺏기>라는 제로섬게임이 완화될 수 있을진 의문이다.
#3.
서울 신청사, 한강르네상스와 함께 <디자인 서울>의 핵심 사업이었던 <DDP project>.
자신이 만들어 낸 청계고가를 손수 뜯어내고
연간 180억의 운영비로 한강물을 끌어오는 인공하천을 지어놓은 직후 대권을 거머쥔
어떤 분의 전철을 밝고자,
“시티노믹스”라는 미명하에 대중에게 가시적으로 어필 할 수 있는 기념비로 추진됐던 이른바 동대문 현대화 사업.
당시, 명동으로 집중되는 관광객을 다변화하기 위해 구상된 이 사업은
그 취지와는 달리 결국 <동대문운동장> 이라는 한국의 유래 없는 문화유산을 파괴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리고 철거가 시작된지 5달.
공사 첫 삽의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동대문 운동장은 다시 언론의 핫 스팟이 된다.
그야말로 조선시대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
그 중 놀라운건 일제가 허물었다고 한탄해 마지않던 한양도성의 일부가 그곳에 뿌리를 남기고 있었다는 것과
지금까지 출토된적 없는 가장 장엄한 아치형의 이간수문과 훈련도감이 그 곳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에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공사 진행에 대한 줄다리를 지속하다
유적“일부”를 보존하고 유적다수를 “이전”해 공원을 조성하는 것에 합의를 한다.
그리고 환유를 잉태한 하디드는 애초 설계비에 맞먹는 설계변경으로 제법 쏠쏠한 장사를 하곤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공원>을 <동대문 역사 문화 공원>으로 이름(?)만 바꾸는 귀여운 업적을 감행한다.
결과적으로 한양도성은 확실히 끊기게 되었고
유적들은 공개공지라는 이름으로 사은품처럼 남겨진 상황.
그런데 이런 쓰라린 광경 속에서도 한 가지 궁금증이 올라온다.
우리가 야구로만 기억하던 동대문운동장 바닥에서 왜 이런 것들이 자리 잡고 있었던 걸까?
무슨 이야기들이 이 녀석 밑에서 우글대고 있던 것일까?
#4.
1924년 1월 8일. 조선일보의 대문짝은 그야말로 들떠 있었다.
바로 조선에도 장엄한 종합 운동장이 들어선다는 것.
“조선각지에 운동열이 왕성해진 이때에 이에 관한 설비가 극히 미비하여
훈련원 운동장을 확장하여 테니스 코트, 빼스볼, 풋볼 경지장과 스탠드를 설비하여
금년 내에 실행토록 진행한다더라”
그로부터 2년 후 사람들이 빡빡하게 들어찼던 한양도성 밖
병사들을 조련하던 동대문의 널찍한 훈련터에 <경성운동장>이 건립된다.
이 운동장의 공식명칭은
<동궁전하 어 성혼기념 운동장 - 東宮殿下 御 成婚紀念 運動場>
즉, 동궁이 결혼한 것을 축하하고자 건립된 운동장이었다.
그런데 곡할 노릇은 여기에서 왕위를 이어갈 세자를 뜻하는 동궁은
마지막 대한제국의 왕인 영친왕의 아들 “이우”가 아닌
한국을 식민 지배했던 일본의 동궁 “히로히토”였던 것.
결국 일본 동궁을 위한 기념물이 조선의 중심부에 건립되는 치욕을 맛본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라고 했나?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이를 설계하여 건립했던 사람은
한국인이 아닌 경성부의 토목기사 “오모리”였던 것.
즉, 100년 전에도 이 땅은 이방인의 손에 의해 조선 500년을 버텨왔던 한양도성이
의도적으로 부서지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 셈이다.
1925년 5월 30일 식민지배의 나팔수 경성일보는 완공이후 이렇게 자평한다.
“본토에 있는 고시엔에 이어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종합경기장이 건립되었다”
#5.
다행히도 일제 식민통치의 위용을 각인시키기 위해 하사되었던 <경기장>은
일제의 의도와는 다르게 식민지 조선의 환호와 감동, 한풀이의 자리로 발돋움해 간다.
경성야구장의 1호 홈런의 주인공은
당시 연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소속이었던 “이영민”
그는 경성운동장 건립계획이 보도된 1924년 일본 동경구락부 대표팀에 선발되어
미국 메이져리그 올스타와 경기를 통해 “조선의 베이브 루스”로 불리었던 사나이였다.
당시의 거구인 베이브 루스 덩치에도 밀리지 않고 함께 포즈를 취했던 그의 흑백사진은
아직도 세간의 회자되고 있다.
또한 그는 축구에서도 배재고보에 우승컵을 안겨 주었던 1등 공신이자
200m, 400m 단거리와 400m, 800m, 1600m 계주의 5관왕을 차지했던 육상의 거물이었던 이영민.
이를 반영하듯 광복이후 동대문운동장에서 개최됐던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는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한 선수에게 “이영민 타격상”을 수여했다.
경성운동장 특설 링에서 일본선수를 때려눕히고
미국까지 진출하여 세계복싱 랭킹 6위에 랭크된 “서정권”
평안도에서 내려와 베를린 올림픽에서 국민의 설움을 위해 뛰었던 마라토너 “손기정”
그리고 일본축구 대표팀에 뽑혀 베를린 스타디움에서 스웨덴을 3:2로 이기는
결승골을 어시스트한 김용식까지...
경성운동장을 누빈 조선인 파워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6.
하지만 경성운동장은 환희의 장소이기만 했던 곳은 아니다.
1945년 8월 15일 1시. 경기장의 주인인 일본의 동궁 “히로히토”가
원폭투하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직후, 경성운동장에는 베옷의 상여 한구가 나온다.
그것은 다름 아닌 조선의 동궁인 “이우”의 장례식이었던 것.
당시 극에 달한 일본의 외정간섭으로 결국 볼모로 끌려가게 된 이우.
그는 죽음을 예상했던 것인지...설사약까지 먹으며 조선에 남으려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원자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광복과 함께 조선은 촉망받는 젊은 지도자를 잃고 만다.
또한 동년 12월. 이곳은 60년의 분단의 원흉이 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설움의 집회장이었으며 4년 뒤에는 하나된 한국을 꿈꾸었던
“백범김구”의 장례식이 치러진 회한의 장소였다.
뿐만 아니라 1956년 6월 25일 학도호국단 체육대회가 치러지다
3일 후 서울이 함락되자
“김일성 장군 환영회”가 이루어진 곳도 바로 이곳, 동대문 운동장이었다.
#7.
1984년 잠실 종합운동장 건립 이후
<동대문 운동장>으로 개명되며 그 역할도 축소된 이곳.
식민통치의 굴욕과 6.25의 시련, 계엄과 경제발전이라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굳건히 버텼음에도 불구하고
2008년 “시티노믹스”라는 정치적 치기아래 “조명탑, 주경기장의 성화”만 남긴 채
83세의 나이로 서울을 떠나게 된다.
2014년 갑오년 3월, 이라크 건축가의 “환유의 풍경”이라는 이름으로
환유시키지도 못하는 기억을 뭍어둔채 우리에게 다가 온 것이다.
갑오년이 한국인들에게 주는 기억은 씁쓸하다.
120년 전 1894년. 짙었던 친일적 성향으로 일본 침략을 용이하게 한 갑오개혁 그리고
이후 을미사변과 더 심해졌던 일제의 수탈.
물론, 지금은 국가적 수탈이 가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이야기를 담아 놓았던 유산들이 “경제활성화, 정쟁의 수단”으로 하나하나 없어진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때마다 서울은 새로운 <정신적 폭력기>를 겪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8.
며칠 전 서울시는 유네스코에 한양도성을 등재하기 위해 끊어진 서울성곽을 복원하겠다 선언했다.
그리곤 얼마 후 언론은 서울시가 동대문 우측에 위치한 124년 된 “동대문 교회”를 철거 하기 위한
절차를 마무리 했다는 기사거리를 내 놓았다.
멀쩡한 근현대사적 문화유산을 부수고 해외 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려는 서울시.
오히려 한양도성의 복원 기회를 듣도보도 못한 외국인의 손에 넘겨 잃도록 방관했던 그들.
그리고 2년 전 비슷한 곳에 위치한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보구여관의 분원)을
소리소문 없이 제거해 버린 백색 도시의 신봉자들.
그들이 명기한 “국제적 명소에 맞는 동대문 주변의 경관개선”은
도대체 어디서 온 환유일까? 아직도 부수고 새롭고 사이버틱한 형태만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도시란 그리고 서울의 이야기란 무엇일까...
#9.
익숙한 서울을 걷노라면
익숙해지지 않는 이야기들과 사실들이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그리고 하나둘 우리의 손 때묻은 공간이
순간 고층건물로 올라가는 것을 볼 때 억누르지 못하는 허망함을 느낀다.
5년 후 서울은 어떤 모습일까?
아니 3년 후 내가 아는 서울은 있기나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