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 유현준
...건축가가 하는 일이 바로 '지우개 달린 연필'의 발명가나 맥가이버가 하는 일과 흡사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벽, 창문, 지붕, 계단, 문 등은 만 년 전부터 있었던 인간의 발명품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주변 환경과 필요에 맞게 모양과 크기를 변형시켜 서로 붙이고 떨어뜨리고 배치하는 일이 건축 디자인이다. 건축가는 발명가다.
...서양은 전통적으로 돌이나 벽돌을 이용해서 벽을 구조체로 하는 건축이었는데,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면서 기둥 중심의 건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비로소 서양 건축은 벽이 주는 한계와 구속으로부터 탈출하게 된 것이다.
...하이테크 건축이란 말 그대로 높은 기술력을 보여 주는 건축이다. 일반적으로 기술이 발달하면 우리는 그 기술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긴다. ... 하이테크 건축에서는 반대로 이런 기술을 노출한다. 쉽게 말해 이 건물이 어떤 기둥으로 서 있는지, 어떤 상하수도 공조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지를 밖으로 노출해서 보여 준다. 그 원조가 되는 건축물이 지금 설명할 파리의 '퐁피두 센터'다.
예배당을 설계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공간적으로 어떻게 정립하느냐다. 어떤 공간에 가면 신이 나를 압도하는 두려운 존재로 느껴지고, 어떤 곳은 신이 편안하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차이는 설계자의 의도에 따라 결정된다. 일단 '롱샹 성당'은 권위를 깨는 디자인이다. 일반적인 종교 건축 공간은 좌우 대칭으로 구성된다. ... 우리 눈에 보이는 자연 풍경에는 좌우 대칭이 거의 없다. ... 따라서 인간이 가장 쉽게 인지하게 되는 규칙은 좌우 대칭이다. 공간을 좌우 대칭으로 만들면 일단 규칙이 만들어진다. ...이는 자연스럽게 어떤 권위자의 존재를 느끼게 만든다. ... 반면에 공간을 좌우 비대칭으로 만들면 이러한 권위를 깰 수 있다. '롱샹 성당'은 네 개 입면과 평면도가 모두 좌우 비대칭으로 디자인되어 있다. ... 기하학적 규칙을 배제한 이러한 비대칭 공간은 나에게 무언가 규칙을
심으려는 강압적인 공간이 아니라 나를 자연스럽게 품어 주는 공간이 된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설계하며 르 코르뷔지에는 경제성을 생각하면서 당대 최신 기술을 이용해 제한된 공간 안에서 더 많은 사람이 개성을 가지고 화목하게 어우러져 살 수 있는 곳을 창조하려고 노력했다. 스마트하고 창의적인 건축가가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집을 만들 수 있는지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보면 알 수 있다.
...건축은 그 나라의 국격을 보여 준다. 건축은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보여 준다. 건축은 그 나라 국민의 성숙도도 보여 준다. 독일 국민은 영국에 대한 열등감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지만 적어도 과반수의 여론은 그런 수준임을 베를린 '독일 국회의사당'디자인은 보여 준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많지만 가장 중요한 다른 점은 미래를 상상하고 그에 따라 죽음을 생각하는 능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 그 건축 공간에서 죽음을 슬퍼하고 서로를 위로하던 인류는 이러한 공감 능력을 바탕으로 더 큰 사회 조직을 만들고 발전할 수 있었다. ... 시간이 흐르면서 죽음을 기리는 공간이나 물체에 장식이 늘었지만 '공감을 자아내는 기념의 공간을 만든다'는 본질은 그대로다.
수많은 나라를 여행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건축하는 이들을 동경하게 되었는데
유현준이라는 건축가의 말과 글이 전공자가 아닌 사람이 듣기에 편해서인지
그의 강연이나 책을 꽤 오래전부터 관심 있게 봐왔다.
워낙 유명한 사람이다 보니 그에 대해 갖는 이미지도 다양할 텐데
나에게 그는 꽤 멋진 '사람'으로 보인다.
비현실적인 얘길 한다는 소리도 왕왕 듣는 것 같은데
내게 그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상상력으로 보이고
혁신은 그런 상상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에 그의 상상 대부분은 내게 긍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를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없지만 여러 매체들에서 보여지는 그는
박식하지만 잘난 체 하지 않는,
여전히 호기심에 가득 찬 유연한 어른으로 보인다.
좋은 어른,
즉 유연하게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한 나에게
꽤 긍정적인 자극을 주는 사람.
어디선가 그가 갈대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걸 봤는데
그게 달리 말하면 유연한 사람 아닐까.
아무튼,
그가 고른 건축물들은 그 자체로도 우와, 할 만했지만
그 건축물을 설명하면서 덧붙인 그의 추측과 상상들이 내게는 더욱 재미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처럼 그 감격을 나도 느끼고 싶다는 마음에 이르렀는데
올해 개중 하나라도 보러 갈 수 있으려나.
상상은 자유니까
꿈꾸는 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