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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토리 Mar 03. 2021

[비포 선라이즈] 향기로 기억되는 사람

겨울이라는 계절과 함께 스쳐간 인연

향기로 남은 사람이 있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향을 특별하게 만든 사람. 그 사람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된 향수. 나는 약간의 과일향이 섞여 시원한 느낌이 나는 남자 향수를 좋아했다. 가볍고 라이트한 향. 한때 유행했던 클린의 코튼향도 좋아했고, CK one도 좋아했다. 중성적이라 익숙한 향들이 애인의 몸에서 나는 게 좋았다. 애인을 사귈 때마다 좋아하는 향수나 혹은 직접 조향한 향수를 선물했다. 그 향들은 모두 여름을 연상하고, 여름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향들이었다. 무거운 느낌을 좋아하는 내가 가벼운 향들을 선호하는 게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짧게 스쳐 지나갔던 인연은 따뜻한 화이트 머스크와 우디향이 섞인 어쩌면 특별할 것 없는 향을 지닌 사람이었다. 처음이라는 그 낯선 감각이 특별할 것 없는 향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그 사람을 통해 특정 향수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을 처음 만났던 겨울이라는 계절과 그 향이 상대와 너무 잘 어울렸다. 짧게 이어졌던 관계의 아쉬움이 그 향으로 짙게 남았다.



비포 선라이즈를 보며 기분 나쁜 두근거림과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타인과의 깊은 사랑. 대화로 보이는 그 사랑의 깊이는 '낯선 곳'이라는 감각과 한정적인 시간에 덧붙여져 한층 더 깊어졌다. 영화 속 사랑을 부러워하거나 꿈꾸지는 않았다. 무게감 있고 깊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그 무게감이 내게 주는 안정감 때문이다. 이 영화가 설레지 않았던 것도 제한된 공간, 제한된 시간 속에서 스쳐 지나가야만 하는 이 사랑의 후유증이 내 일상을 잠식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본능적으로 먼저 나를 보호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아야만 하는 그저 판타지로 남을 영화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 공간에서 만든 둘 만의 추억과 기억, 감정들이 그 공간을 상상할 때마다, 기억할 때마다 생생하게 몸에 새겨져 다시 재현될 것이라는 점에서 가슴이 조금 아려왔다. 그때 문득 어떤 향기가 코를 스치고 지나갔다. 기분 나쁜 두근거림은 그 향기를 처음 맡았던 그때의 감각이 되살아나며 시작되었고, 익숙해졌으나 다시 낯선 존재가 된 그 사람과 향을 떠올리며 아프고도 무거운 감정들이 나를 휘감고 지나갔다.


영화를 보고 침대에 누워 셀린의 대사들을 복기한다. 셀린은 사랑을 마주하며 느끼는 두려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 순간적인 느낌과 생각들을 솔직하고 격 없이 털어놓는다. 그 차분하고도 솔직한 셀린의 감정과 대사들이 마음을 울렸다. 어쩌면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타인의 존재, 자연스럽게 스며든 사랑, 경계의 끈을 놓는 그 순간 터져 나오는 꾸밈없는 감정들이 아니었을까.


두 사람에게 사랑의 기억이 낯선 공간을 통해 몸에 새겨진 정동이라면 나에게 사랑은 무거운 향으로 남았다. 특이할 것 없는 공간을, 특이할 것 없는 향을 몸에 각인된 정동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사랑이 만들어내는 강력한 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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