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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니에드만 May 04. 2018

<폴란드3> 바르샤바 시민의 72시간 참교육

이제 막 퇴사한 前 신문기자의 폴란드 여행기 3.

폴란드 바르샤바 체류 3일째. 


반강제적으로 ‘경청’하는 사람이 돼 가고 있다. 낳아주신 부모님 말도 대충 흘려듣는 때가 대다수인데 3일 만에 아주 탁월한 리스너로 변모했다. 

바르샤바 시민들의 72시간 참교육의 효과인가. 


한국에선 내 말만 앞세우다 일을 그르친 게 한 두 번이 아닌데, 여기선 묻고 또 물으며 상대 의사를 확인한다. 폴란드에서 일하면 일처리는 늦겠지만 실수는 안할 것 같다.

폴란드 바르샤바 구시가 잠코비 광장  ⓒ 토니에드만


폴란드는 1989년 민주화에 성공하며 사회주의 체제를 끝냈다. 그만큼 다른 자유주의 국가들에 비해 영어를 받아들이는 속도도 늦었다. 때문에 최근 대학가에서 젊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영어를 포함한 외국어 공부 열풍이 분다고 한다(실제로 바르샤바 구시가 일대에서 만난 20~30대 영어 구사력은 굉장했다). 


하지만 2004년에야 유럽연합(EU)에 가입했을 정도로 폴란드 정부는 민주화 이후에도 개방에 소극적이었다. 프랑스나 독일에 비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인구가 적은 것도 이 때문이다.  


내가 영국은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나 독일에서 상대적으로 편안함을 느꼈던 건, 나보다 그들이 영어를 더 잘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완성된 문장으로 묻지 못해도 그들은 찰떡같이 알아듣고 대답해줬다. 여긴 다르다. 더 악화된 형태로 알아듣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말만 걸어봐’하는 표정까지 짓고 있다(폴란드인들이 그렇게 친절한 것 같지는 않다). 더구나 단어나 명칭, 이름은 정말이지 복잡하고 길다.


러시아어를 포함한 슬라브족 언어가 다 어렵긴 하다. 폴란드는 이에 더해 숱한 피지배로 여러 계통의 언어가 뒤섞였다. 자연히 더 복잡해졌다. 초심자에겐 문장이 아니라 간단한 단어조차도 발음하기가 쉽지 않다. 예컨대, 바르샤바 최고 명소 중 하나는 ‘예로졸림스키에’ 거리에 있고, 대통령 궁은 ‘코니에츠폴스키’가 지었으며, 폴란드 대표 작곡가는 ‘스타니슬라브 모니우슈코’이고, 폴란드 출신 <쿠오바디스> 작가는 ‘헨리크 시엔키에비치’다.

바르샤바 대학 인근의 한 식당 풍경 ⓒ 토니 에드만



때문에 지금 이곳에서 잘 살아남기 위해서 ‘경청’은 불가피하다. 긍정을 부정으로 알아듣거나, 방향을 반대로 이해했다가는 금전과 시간 소모가 막심하다. 상대 잘못이 아니라 내 부족함 때문이니 탓할 곳도 없다. 


내가 이렇게 ‘경청’의 미덕을 떠올려 본 게 또 언제였나 싶다. 아 그렇다! 나를 포함한 온 국민이 반강제적으로 경청의 미덕을 발휘하는 시간이 있었다. 수능 언어영역과 외국어영역 듣기 시간. 그리고 토익 L/C시간. 나 역시 그때가 마지막 아니었나 싶다.


우리는 하루에도 무수히 많은 말을 듣는다. 아니 정확하게는, 내 관심사나 이익과 관계된 말들을 듣는다. 나머지는 흘려듣거나 듣는 척만 한다. 물론 정보 과부하 때문에 뇌가 의도적으로 불필요한 정보를 생략하기도 하겠지만, 그 정도가 좀 지나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서점에만 나가봐도 이를 알 수 있지 않나. ‘경청’을 강조하는 책들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자주 올라있다. 잘 듣는 사람들이 잘 말하는 사람보다 존중받고 있는 사회라면 이런 현상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 픽사베이


서로 영어가 짧다보니 다소 이채로운 느낌도 든다. 내가 솔직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은 착각. 감정을 표현할 때 유독 그렇다. 무엇 때문에 고마운지 몰라도 무조건 ‘thank you’다. 무엇 때문에 좋은지 몰라도 ‘good’이다. 


폴란드어로 말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이유를 물어선 안된다. 물어도 구체적으로 말해주기 어렵다. 베이비 토크 같다. 어린이들 대화를 들어보면 아는 어휘가 부족하다보니 아주 솔직하지 않나. 어른들이 감추고 싶은 비밀을 적나라한 표현으로 폭로하기도 하고.


간단한 주장에도 유보를 달면서 돌려말하는 나같은 사람도 이곳에서는 직설적이고도 과감한 상남자가 될 수 있다. 결국 언어가 어렵게 느껴지니, 감정을 여과하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형용사나 부사 등 각종 수식을 걷어내면 문장이 담백 명확해지는 것처럼 감정도 뼈대만 남아서, 솔직해진다.


*폴란드에서 ‘경청’을 배우다니, 뜻밖의 수확이다. 늦었지만 펍에 다녀오려한다. 폴란드 맥주 꿀맛이다. 꿀먹은 벙어리처럼 또 ‘경청’하다 오겠지. 1달 뒤 한국으로 돌아가서는 좀 잘 듣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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