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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니에드만 May 06. 2018

<폴란드6> 골목길을 돌려주세요

이제 막 퇴사한 前 신문기자의 폴란드 여행기 6.

출장을 제외하고, 유럽에서 한 도시에 일주일을 머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도 없이 다닌 것 역시 그렇다. 구시가를 중심으로 걸으면, 대략 3km 반경 안에 도시가 들어오니 걷는 것만으로도 어디든 돌아볼 수 있다. 그러다 눈에 띄는 곳에 들어갔고, 흘러가면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폴란드 바르샤바 구시가 골목길 풍경  ⓒ토니에드만

‘그래야만 한다’는 의무에서 벗어나 철저히 우연에 바르샤바 여행을 맡겨 봤다. 길치는 아니니 숙소로 돌아올 수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다 ‘골목길’을 발견했다. 잠코비 광장과 구시가 광장 두 곳을 축으로 사방으로 가지치기한 골목들은 방향을 틀 때마다 새로운 풍경과 이야기를 들려줬다. 


대부분의 유럽 구시가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민들을 품어주는 너른 광장이 있고 이를 향해 흘러드는 골목 지류들이 도시를 구성한다. 그래서 중세를 그대로 간직한 유럽의 구시가는 그곳이 어디든, 같은 곳을 반복해 걸어도 지루하지가 않다. 미처 가보지 못한 새로운 미로가 있는 건 아닐까 호기심도 늘어간다. 고풍스러운 아름다움 때문에 어느 각도로 찍든 그럴듯한 사진까지 나온다. 프로 사진가가 아니어도 대략 그에 준하는 풍경을 얻을 수 있다.


바르샤바엔 이른바 도쿄나 서울 같은 메가시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휘황찬란한 랜드마크는 존재하지 않는다.엄격하게 평가해서 ‘originality’의 관점으로만 보면 이 도시는 높은 점수를 받긴 어렵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폐허가 된 뒤 복구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유럽의 타 구시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전적 건축미가 높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폴란드 바르샤바 구시가 골목길 풍경  ⓒ토니에드만

다만 ‘바르샤바’라는 역사적 상징성이 이 도시를 남다르게 만들어주는 것만큼 더 많은 극적인 내러티브가 숨어있을 것이다. 건물은 무너졌지만 길은 그때도 지금도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지난 기행기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바르샤바는 세계대전 당시 총탄 흔적과, 융단폭격으로 파헤쳐진 건물의 잔해를 지금도 그대로 안고 있다. 


골목길을 걷다보면 쉽게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총탄 하나마다 두툼한 한 권의 소설이 쓰일 수 있을만한 이야기가 녹아있을 것이고, 건물 잔해 뒤편마다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폭격을 등진 어머니의 사연도 숨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가 어머니의 희생으로 극적으로 살아난 뒤 지난 70년 세월을 돌아보는 회한도 배어 있을 것이다.


김기찬 사진작가를 아시는지. 1970~1990년대 서울의 달동네와 골목안 풍경을 집중적으로 카메라에 담은 작가다. 21살 때 대학도서관에서 이 작가의 사진집을 보면서 어린 날을 떠올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학교를 가려고 나와 옥상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인사하던 장면, 집 앞 슈퍼마켓 평상에서 줄담배를 피우며 바둑을 두던 할아버지들을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던 기억, 학교에서 돌아오면 오늘은 또 어떤 말썽 피웠냐고 농을 건네시던 할머니들, 대로변으로 나가기까지 골목길을 걸으면서 했던 우리 가족에 대한 생각, 친구들과 팽이치기, 술래잡기, 딱지치기하며 해지는 줄 몰랐던 집 앞 좁은 마당.

폴란드 바르샤바 구시가 골목길 풍경  ⓒ토니에드만

골목길이 사라진 시대가 슬프다. 기성 세대는 골목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서 사람 냄새 나는 서사를 지닌 어린 시절을 보냈을 가능성이 크지만, 내 세대만 해도 아파트에서만 평생을 보낸 친구들이 많다. 직선과 직각으로 모양을 잡은 건물과 대로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사실을 취할 줄은 알지만 상상하는 힘은 잃어버렸다. 그렇게 얄팍해진 서사들이 우리 세대의 삶의 의미를 가볍게 만들어 버린 건 아닌지, 해서 우리 세대가 무의미에 투항해 자꾸 삶을 쉽게 놓아버리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서울은 언제쯤 ‘걷고 싶은 거리’가 될 수 있을까. 관에서 ‘걷고 싶은 거리’라고 팻말을 붙여주고 홍보하는 거리가 아니라, 시민들이 자생적으로 만들어가는 그런 거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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