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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하 Jan 23. 2024

대지의 사랑

종갓집 장손 며느리 이야기


친구의 이야기를 3인칭 시점 掌篇으로 썼습니다.


Carl Larsson - october



창문틈으로 간신히 이르러 서성거리는 바람이 차다. 별빛이 희미하게 멀어져 가는 새벽 5시, 자명종이 울리자마자 식구들이 깰세라 재빨리 알람을 껐다. 세면대에 차가운 물을 받아서 고양이가 세수를 하듯 얼굴을 비벼댄다. 츄리닝을 가볍게 입고 차열쇠를 찾아들고, 아직 잠자고 있는 아이들을 방문틈으로 살짝 들여다보다가 집을 나선다. 민서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밖으로 나오니 햇살이 퍼지기 시작했다. 시동을 켜고 달린다. 자유로, 아,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민서는 일 년을 하루 같이, 매일 그 자유로를 새벽마다 달렸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아버님은 분가를 하라고 하셨다. 아버님 혼자서 어떻게 생활하실 것인지, 당신 자신의 문제는 뒤로 하고서라도 이 년 동안 똥오줌을 다 받아내며 시어머니의 병간호를 지극정성으로 했던 며느리에 대한 배려가 우선이셨다. 안 나가겠다고 버티기를 한 달, 결국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타협하여 내린 결론은 매일 아버님의 하루치 진지를 새벽에 와서 챙겨 드리기로 약속하고, 30분 거리의 일산 시내로 분가를 했다. 그렇게 일 년이 흘렀다. 육체적으로 힘든 날이 많아서 그때마다 다시 본가로 들어가겠다는 며느리를, 아버님은 만류하셨다. 젊은 사람은 젊었을 때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좀 더 누려야 한다는 아버님의 지론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오늘따라 자유로 하늘이 더없이 청징하다. 하늘을 유영하는 철새 떼를 따라서 지나온 상념들도 날아오른다.  ‘그날도 하늘빛이 이랬어...  어머니를 처음 보았을 때 그날도 하늘빛이 이랬어...’ 아마 김장철이었으리라. 어머니는 산언덕만 한 배추더미 속에서 상한 배추를 고르게 계셨다. 머릿수건을 쓰신 어머니는 밭둑 위에 피어난 가냘픈 구절초와 닮았다. 당신을 향해 다가갈 때 해맑은 미소로 손을 흔들어 주시던 어머니, 그것은 일렁이는 잔물결의 반짝거림처럼 설핏설핏 그리움을 불러대는 정경으로 다가왔다. 함께 어우러져서 풀빛으로 부서지는 햇살들은 언젠가 유심히 보았던 밀레의 전원그림을 떠올리게 했다.  


그날은 지금 남편이 된 그의 집에 처음 인사를 하러 간 날이었다.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새하얀 원피스를 말끔하게 차려입고, 덜컹거리는 시골길로 들어섰다. 사뿐사뿐 걷고 싶었는데 뾰족구두의 굽이 자꾸만 흙길 속으로 빠져버려서 그의 손을 꽉 잡고 작신작신 걸을 수밖에 없었다. 농한기로 접어들기 직전, 한참 거둬들인 곡식이며 겨울을 준비하는 마른 나물들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고 김장에 쓰일 파 뭉치, 마늘뭉치들이 풋풋한 흙냄새를 풍기며 농가의 모습을 그대로 전하고 있었다. 실에 꿰어져 처마 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덜 익은 곶감들이 그때만큼은 꼭 덜 익은 민서 자신의 모습 같아서 검게 그을린 어머님 앞에 섰을 땐, 낯선 이방인이 된 듯이 머뭇거렸다. 방바닥의 버석거리는 흙 알갱이들이 민서가 신은 얇은 스타킹의 올들을 미세하게 자극할 때는 못 갈 곳에 간 것처럼 송구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러나 머뭇거림도 잠시, 그가 아버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자 이내 따라서 그 옆자리에 살포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일손이 부족해서 잠시도 쉬지 못하던 어머니가 머릿수건을 내려놓으시고 가스레인지를 켜서 찌개를 끓이고 반찬을 담아서 금방 풀내음 가득한 밥상을 뚝딱 차려주셨다. 밥상을 받아서 네 사람은 마치 오랫동안 함께 해온 가족처럼 특별한 대화 없이 밥을 먹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민서는 가디건 소매 자락 안으로 아무렇게나 둘둘 말려 올라간 새 하얀 원피스의 소매 자락을 손가락에 힘을 주어 끌어내리면서 치맛자락에 묻은 김칫국물을 보았다. 빠알간 자국, 새 하얀 원피스자락 위에서 더욱 선명한 자국, 백지 같은 인생에 운명처럼 한 점을 찍어대는 새로운 삶의 예감이었다.


그리고 민서는 그와 결혼해서 종갓집 장손 며느리가 되었다. 그 후로 민서는 시댁에 갈 때에는 언제나 김칫국물이 튀어도 좋고, 풀물이 들어도 좋을 헐렁한 바지에, 아무렇게나 둘둘 말아 올려도 괜찮을 셔츠를 입었다. 물 한 방울 손끝에 안 묻혀보고 귀하다면 귀하게 자란 그녀였지만 남편에 대한 사랑 하나만으로 참으로 겁 없이 택한 결혼이었다. 평탄하게 자라서 대학에 들어갔고 교사 자격증을 땄다.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발령이 났고 맨날 까르르 웃고 벙그르르 울기도 하는 천방지축 아이들 틈에서 천진하기만 했던 스물일곱 해의 행로 앞에 모든 것은 핑크빛으로만 보였다. 과연 삶이 핑크색만으로 칠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조차도 알지 못했던 시절, 민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의 어머니와도 행복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 마음은 무지하게 순수해서 앞으로 기다리고 있을 삶의 무수한 무늬들을 가늠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아름다운 분이셨다. 고부간의 세대 차이, 자라온 환경의 차이를 며느리가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배려의 말씀, 당신이 늘 손수 먼저 말없이 선행하시는 모습들이 민서에게는 공경의 마음을 일게 하였다. 그러나 종갓집 며느리의 몫은 공경의 마음만으로, 행복하게 살겠다는 열망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 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면서 뒤늦게 알았다. 희생하고 감내하는 여인들의 삶을 책장 너머로만 들여다보면서 보랏빛 환상을 키우며 그토록 가치 있는 삶, 뭔가를 명목상으로 내어 놓고 그렇게 살았노라고 말하고 싶었던 허영이 그녀의 마음속에 있었음을. 그런 삶은 희생과 인내만으로 치러질 수 없는 커다란 숭고함이 깃들어야 함을 어머니와 함께하는 몇 년의 시간 속에서 서서히 체득해 갔다.


언제나 어머니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계셨다. 밭에서, 논에서, 하우스에서, 마당에서, 부엌에서, 거둬들인 농작물을 내다 파시고 늦은 저녁에 도깨비방망이 두둘 기 듯이 맛난 것들을 내주셨다. 어머니의 손을 거치는 것들은 모두 근사한 것들로 변했다. 많은 종류의 김치들도 어머니의 손을 거치면 신기하게도 몇 통씩 담아져 나왔고 5남매는 참새 새끼처럼 그것을 너무나도 쉽게 가져다가 먹었다. 제사는 일 년 열두 달 끊이지 않았고 눈으로 바라만 봐도 엄청난 양의 음식들을 일사천리로 준비하시는 어머니는 철인 같았다.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민서는 숨이 찼다. 버거워서 소리 없이 많이도 울었고, 포기하고 싶었던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차츰차츰 당신의 손끝에서 번져오는 깊은 사랑을 차곡차곡 담기에 이르렀다.


5년을 지나오는 동안, 민서도 이제 제법 종갓집 며느리의 태를 갖추어 갈 때쯤이었다. 어머니가 돌연 암으로 쓰러지셨다. 종갓집의 큰살림을 꾸리며 어머니를 병간호하기 위해 민서는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결국 그녀는 학교에 사표를 내고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모두 본가로 들어가 버렸다. 그토록 부지런하셨던 어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손가락하나 움직이지를 못하셨다. 그것은 아픔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저 너머의 극이었다. 삶과 죽음이 손바닥을 뒤집듯이 극명하게 갈라지는 순간, 기나긴 밤을 지나 새벽이 찾아오는 순간, 밤새 간호하느라고 한숨도 못 잔 며느리를 무척이나 평온한 얼굴로 바라보던 어머니는 며느리의 손을 꼭 잡았다.


“미안하다, 아가야...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 ”


씨를 뿌리면 어떤 곡식은 뿌린 대로 잘 자라주기도 하고 어떤 채소는 자라주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조급해지는 민서를 향해  ‘우리가 사는 것도 그렇게 순리대로 사는 거란다 ‘  말씀하시며 조용히 미소 지으셨던 어머니, 땅에서 나고 땅을 일구셨던 어머니는 그 큰살림도 땅을 일구는 것처럼 조화롭게 하셨고 마침내 땅으로 돌아가는 순리조차도 그 인자하신 미소로써 영면하셨다.


아주 먼 옛날부터 한 인간으로서의 온당한 몫을 누리지 못하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고단한 세월을 견뎌왔던 여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기적이지 않았고 손해라는 것을 기꺼이 기쁘게 감수했던 여인들, 어머니라는 이름만으로도 버거워하는 이 시대의 여인들은 감히 따라갈 수도 없는 인고의 세월을 당신의 삶을 통해 들여 다 보았다. 거둬들인 알알의 곡식이 우리의 몸을 섬기고 대지로 돌아가듯이 사람과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자신을 낮추어 섬김의 표상을 구체화시켰던 어머니, 향수의 근원에 어머니가 있었고 그것은 믿음이 되었다. 민서에게 그 믿음은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대지 같은 사랑이 내게도 생겨날 수 있을까.......’


상념이 철새 떼의 긴 꼬리를 물고 하르륵 날아간다. 시골집에 도착했다. 아버님은 아직 주무시고 계신 걸까. 살금살금 문을 열고 부엌으로 들어선다. 장독대에 장을 푸러 가면서, 부엌 뒷문을 열고 처마 밑에 매달아 놓은 마늘을 가지러 가면서, 문득 민서는 어머니가 옆에 와 계신 듯 한 온기를 느낀다. 보글보글 된장찌개가 끓어오르고 밥이 다 되었다. 따뜻하다.


“아버님, 진지 드세요."


아직도 이 큰살림이 버겁기만 한 민서이지만, ‘그래, 잘할 수 있어, 아이들이 조금 더 크면 다시 이 집으로 들어올 거야, 어머니가 사셨던 것처럼 순리대로 살 거야’ 라며 푸르른 다짐을 한다. 다시 아이들을 깨우러 일산으로 향하는 민서의 옷에 된장찌개 국물이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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