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만드는 어떤 것
산과 나에겐 둘만의 이상한 취미가 있다. 그건 바로 모든 단어를 외계어로 만들기. 보통 단어의 모음을 바꿔버리거나, 한국어의 연음 법칙이나 끝소리 규칙, 거센소리와 된소리를 마음대로 조합해서 만들어진다. 밖에 나가면 영어나 독일어만 사용해야 하는, 스트레스와 긴장을 은은하게 품고 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무 생각 없이 모국어를 갖고 놀고 싶은 마음의 발현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한글을 파괴하던 인터넷 세상에 유년기부터 길들여진 밀레니얼 세대의 흔한 장난인지도 모른다.
"우리 오늘 저녁 뭐 먹어?"
"짜짜찌개 먹을까?"
"짜짜찌개? 짜짜찌개 좋지!"
예를 들면 이런 거다.
그럼 과연 짜짜찌개는 무엇인가? 짜장을 넣은 찌개? 엄청 짜게 만든 된장찌개? 아니면 국물을 졸인 짜글이?
정답은 바로!
김치찌개입니다!
(웅성웅성, 짜짜찌개가 어떻게 김치찌개냐. 웅성웅성)
김치찌개가 짜짜찌개가 된 의식의 흐름은 이런 거다. 김치를 괜히 김짜라고 부른다. 김짜찌개는 뭔가 발음이 어렵다. 그래서 김을 그냥 뒤의 음절과 똑같이 짜로 바꿔버린다. 그러면? 짜짜찌개의 완성.
한번 들어서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이런 단어들은 우리 일상에 수없이 녹아 있다. 그래도 쉽게 유추 가능한 단어도 많다. 우리의 대화 중 적어도 7할은 오늘과 내일, 그리고 모레 무엇을 먹을지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그중 많은 단어는 자주 해 먹는 메뉴 이름이다. 아침을 먹으면서 우리는 보통 이런 대화를 나눈다.
"오늘 저녁엔 뭐 먹지?"
"그러게. 냉장고에 고기도 없지 않나."
"그러면 파슷하?"
"오, 파슷하 좋다. 맛토마 소스 있나?"
"없어."
"냉동실에 새우 있지? 그럼 새우오일파슷하 먹자."
"그래. 그럼 내가 저녁에 자기 오는 시간에 맞춰서 쌔우오일파슷하를 해놓겠다."
아마도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거주하는 유학생들이 가장 많이 해 먹는 메뉴 중 하나는 파스타일 것이다. 일단 파스타면 500g 한 봉지는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0,99유로에서 2,70유로 정도면 살 수 있다. 게다가 세일을 자주 해서 더 저렴하게 사는 경우도 많다. 토마토소스나 페스토 소스의 종류도 다양하고, 보통 5유로 이하로 살 수 있기 때문에 1인 기준 한 끼를 1-2유로 정도로 저렴하게 때울 수 있어 라면보다 저렴하고 건강한 식사가 된다. (아시아 마트에서 사는 한국 라면의 가격은 보통 1,6유로 정도다.)
파스타는 유학생뿐만 아니라 현지인도 즐겨 먹는 메뉴다. 우리나라에서도 파스타는 이미 집에서 간단하게 해 먹는 흔한 메뉴가 되었지만, 독일인들에게는 빵과 더불어 주식인 느낌이다. 대학교 학생식당에는 언제나 파스타 메뉴가 있고,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흔하게 아이들에게 먹인다.
우리의 독일 생활에서도 빠질 수 없는 것이 파스타다. 아니, 파슷하. 파스타와 파슷하는 사실 올바른 한글 발음법으로는 둘 다 [파스타]로 읽어야 한다. 우리 국어의 끝소리규칙에 따르면 음절의 종성(마지막 소리, 받침)은 ㄱ,ㄴ,ㄷ,ㄹ,ㅁ,ㅂ,ㅇ 7가지만 가능하다. 그래서 받침 'ㅅ'은 'ㄷ'으로 발음된다. 그리고 이 받침 'ㄷ'은 뒤의 'ㅎ'와 만나면 거센소리인 'ㅌ'으로 변한다. 이것이 '격음화' 또는 '거센소리되기'다. 그래서 [파슫하] -> [파스타]가 되어야 옳다. '비슷하다'가 [비스타다]로 발음되는 것과 같은 경우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파스타가 아니라 파슷하라는 것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파슫하]라고 발음한다. 두 번째 음절의 받침을 확실히 발음하고, 뒤의 ㅎ 소리도 잊지 않는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밥과 빵 다음으로 우리의 주식이 된 파슷하. 그중 독일에서 처음 시도해 본 파스타이자 즐겨 먹는 메뉴 중 하나는 바로 정통 까르보나라다. 바야흐로 12년 전, 나는 자유를 꿈꾸는 20대 초반의 빛나는 영혼으로서 유럽을 50일 동안 혼자 여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 로마의 한 식당에서 까르보나라를 주문했다. 잠시 후 내 앞에 놓인 까르보나라는 그동안 내가 알던 까르보나라와 너무 달랐다. 한국에서 먹던 크림소스 파스타를 기대했는데, 크림은 없고 뭔지 모를 노랗고 진한 소스와 치즈가 가득 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게 너무 맛있었다. 면을 쫀쫀하게 감싼 소스와 치즈의 고소한 맛, 기분 좋은 후추향까지. 알고 보니 원래 정통 까르보나라는 치즈와 달걀노른자, 소금과 후추, 그리고 '관찰레(Guanciale)'라는 이탈리아의 염장육을 사용해 만드는 파스타였다. 나는 크림소스 베이스인 한국식 까르보나라도 좋아하지만, 그때 로마에서 먹은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독일에 온 후, 문득 그 까르보나라를 만들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는 다양한 치즈를 저렴하게 구할 수 있으니까. 산이 레시피를 검색해 휘리릭 만들어 준 까르보나라의 성공 이후, 우리는 지금까지 크림을 넣지 않은 달걀과 치즈 베이스의 까르보나라를 즐기고 있다.
'페코리노 로마노' 치즈와 '관찰레'만 사용하는 것이 '정통 레시피'라고 전해지지만 레시피는 입맛이나 기호에 맞게 변화하기 마련. 산은 인터넷에서 찾은 일종의 대체 레시피로 만든다. 우리는 보통 '그라나 파다노' 치즈와 두꺼운 베이컨을 사용한다. 그리고 소스를 위해 치즈에 2인분 기준 흰자를 포함한 전란 두 개와 노른자 두 개를 넣는다. 식당에서 판매하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저렴한 재료로 맛을 내는 것만큼 큰 이득이 없다. 게다가 까르보나라의 '정통 레시피'에 대해서는 이탈리아 내에서도 논쟁이 있다고 한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까르보나라'라는 명칭이 문헌에서 등장한 것이 1950년대 이후이고, 세계 2차 대전 이후 연합군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설과, 이전부터 로마에 존재하던 요리라는 설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래 베이컨과 크림을 넣은 까르보나라가 보편적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한국식처럼 완전한 크림 베이스는 아니고 치즈와 노른자에 치즈를 첨가하는 정도긴 하지만.
아무리 맛있어도 같은 음식을 먹다 보면 질리기 마련이기에 우리는 최대한 변화를 주려고 노력한다. 우리라기보다 산이라고 해야겠지…… (99프로는 산이 만들기 때문에…). 흠흠. 아무튼 매일같이 요리를 하다 파스타의 도사가 되어버린 산은 바질페스토 파스타, 오일 파스타, 토마토소스 파스타에 각종 재료를 넣어 내 입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파스타에서 소스의 맛도 중요하지만 맛을 좌지우지하는 큰 요소는 바로 면이다. 그냥 세일하는 제일 저렴한 면을 사 먹던 우리는 내가 어느 숏폼 비디오에서 본 '이탈리아인피셜', '이탈리아 사람들이 많이 먹는 파스타면'으로 파스타를 만들어 먹은 후, 맛이 한층 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 면은 바로 '데 체코(De Cecco)'. '데 체코'는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이탈리아의 파스타면 제조회사로, 1886년 돈 필리포 지오반니 데 체코(Don Filippo Giovanni De Cecco)가 그의 형제와 함께 설립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파라 산 마르티노(Fara San Martino)에서 인근 지역의 최상품 밀가루를 생산하는 사람이었다. 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지식과 자신의 엔지니어링 경험을 결합하여 파스타면을 저온에서 24시간 이상 건조하는 방식을 도입했고, 이전에 태양 아래에서 건조되어 날씨에 좌지우지되던 환경을 개선해 파스타의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데 체코사는 파스타의 원재료인 듀럼밀로 만든 밀가루, 세몰리나의 품질 관리에 특별히 신경을 쓴다고 한다. 모든 회사들이 자사의 제품 품질이 가장 뛰어나다고 주장하기에 객관적인 진위여부는 제쳐두겠지만, 종종 가성비의 유혹에 이끌려 다른 세일 상품에 눈을 돌린 다음에도 어쩐지 우리의 혀가 항상 다시 데 체코면을 찾는 걸 보면 아주 거짓말도 아닌 듯하다. 데 체코 면은 보통 500g에 2.50-2.60유로로 다른 제조사에 비해 조금 비싼 편이다. 그래도 종종 세일을 하면 1.50유로에 살 수 있는데, 우리는 그때 왕창 쟁여두는 방식으로 비싼 면을 사 먹는 죄책감을 줄이고 있다. 듀럼밀의 단백질 함량을 높이기 위해 애쓴다는 홍보 문구를 그대로 믿으면서, 건강을 위한 투자라고 위안하는 것은 덤이다.
감정기복이 심해 자주 우울해하는 나를 위한 만병통치약이 '맛'이라는 걸 아는 데다가 스스로도 맛에 대한 기준이 높은 산은 자주 맛의 단계를 높이기 위해 골몰한다. 그냥 항상 맛있는 걸 먹고 싶은 내가 떠오르는 생각들을 첨언하면, 그 단계는 순식간에 목표점에 도달한다.
우리는 비슷하면서도 은근히 다른 입맛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파스타의 소스다. 연애 시절,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피자 하나와 파스타 하나를 주문해야 하면 언제나 의견이 갈렸다. 나는 무조건 크림소스파, 산은 토마토소스파. 일단 나는 버거킹 와퍼에도 토마토를 빼고 먹을 정도로 토마토를 좋아하지 않았고, 식당에서는 집에서 쉽게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우리가 고급 레스토랑에 가진 않았기 때문에 내게 토마토소스 파스타는 시판 싸구려 토마토소스로 집에서 해 먹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맛이었다. 반면에 산은 느끼한 음식을 좋아하지 않고 위장이 약한 데다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유당불내증까지 있어 크림파스타를 먹으면 언제나 속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 둘 중 하나는 못마땅한 선택을 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현재 독일. 우리는 한국에서처럼 식당에 자주 갈 수 없고, 우리 집엔 자아가 있는 요리사가 있다. 내가 주문하는 요리가 무조건 식탁에 올라오지는 않는다. 나는 재료값 외에 그의 노동에 대한 보수를 지불하지 않고 노동을 거의 더하지도 않기 때문에 주방의 결정권은 오로지 산셰프에게 있다. 얻어먹기만 하면서 말만 많은 무전취식 고객의 의견을 많이 반영해주긴 하지만 본인이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셰프님의 최애 파스타가 토마토소스 파스타이기 때문에, 그리고 시판 소스를 사서 만들면 아주 간단하기 때문에, 그는 독일에 온 후 토마토소스 파스타를 주구장창 만들었다. 팽팽 놀다가 가뭄에 콩 나듯 일을 하는 주방보조에게는 토마토소스의 선택권이 주어지긴 했다. 볼로네제, 아라비아따, 바질리코, 토스카나, 나폴리타나 같은, 어차피 다 같은 토마소스인 소스 중에서 나는 매콤한 고추나 향긋한 바질을 고르며 원하는 맛을 선택한다는, 조금의 위안을 찾았다.
언제나처럼 조금 시큰둥하게 토마토소스를 고르던 어느 날, 우리는 장을 보던 마트의 그릇 코너에 있었다. 식기를 최소한으로 구매한 터라 그릇이 부족하다고 느꼈고, 뭔가 괜찮은 게 없는지 보던 중이었다. 그때 내 눈에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그라탱 그릇이 들어왔다. 이거다. 이게 이제 나를 살릴 것이다!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토마토소스 파스타. 그건 바로 그 위에 치즈를 가득 덮어 오븐에서 구워 낸, 그라탱 버전의 토마토소스 파스타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게 녹은 치즈를 아래에 있는 토마토소스 파스타와 뒤적뒤적 섞으면, 토마토소스의 상큼함과 치즈의 고소함이 입 안 가득 퍼진다. 그때 토마토소스는 최악이 아니라 최고의 선택이 된다. 오히려 크림 베이스의 파스타로 만들면 너무 느끼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라탱 접시의 구입 이후, 나는 토마토소스 파스타를 행복하게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독일의 치즈는 맛있고, 베를린의 우리 집에는 오븐이 있다. 산은 이제 토마토소스 파스타를 만든 후 마지막에, 항상 치즈를 한가득 뿌려 구워 준다. 오븐에서 뜨겁게 데워진 그릇은 식사를 마칠 때까지 파스타를 따뜻하게 유지해 준다. 음식이 식는 게 싫어서 종종 먹던 와중에도 전자레인지에 다시 데우곤 하는 내게는 완벽한 메뉴다.
얼마 전, 집밥 메뉴의 다양화를 고민하던 산이 문득 내게 말했다.
"크림소스 파스타 해줄까?"
독일에 온 초반에 딱 한번 해주고는 3년 동안 단 한 번도, 정말로 단 한 번도 해주지 않은 음식이었다. 크림을 넣은 로제떡볶이를 해준 적은 있어도, 크림소스 베이스의 파스타는 해주지 않았는데.
콧노래를 부르며 장을 보러 갔다.
"진짜 해주는 거야? 크림소스 파스타?"
"싫어? 그럼 안 해준다?"
"아니, 엄청 좋은데? 꿀휨쏘쓰 파슷하라니. 꿀휨쏘쓰 파슷하, 꿀휨쏘쓰 파슷하~~~"
"내가 꿀휨쏘쓰 파슷하 해줄게~"
식탁에 놓인 새우크림소스 파스타. 우리 집 식탁에 크림소스파스타가 있다니. 감격스러웠다. 화이트 와인을 잔에 따라 옆에 놓았다. 경건한 마음으로 식탁에 앉아 산과 잔을 부딪쳤다.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른 먹어 봐."
포크로 면을 떠서 스푼에 돌돌 감은 뒤, 입에 넣었다. 진하고 부드러운 크림을 가득 머금은 면과 느끼함을 잡기 위해 넣은 고춧가루의 매콤함이 입안에서 풍성한 춤을 췄다.
"너무 맛있어……."
"맛있어? 괜찮아?"
"어, 나 너무 행복해… 흐잉."
언제나처럼 내 표정을 확인한 다음, 그제야 산이 수저를 들었다.
"맛있는데?"
"그치, 맛있다니까. 완전 맛있어."
"치즈도 넣었더니 맛있다. 그치."
"응. 아, 근데 우리 그거 안 먹었다."
얼마 전부터 우유나 크림을 먹기 전 필수로 먹고 있는 락타아제 효소제를 사이좋게 한 알씩 입에 털어 넣었다. 속이 안 좋아도 맛있는 걸 먹는 게 더 중요하던 나는 컨디션이 나쁘면 아무것도 못 하는 나약한 인간으로 나이 들어 가고 있다. 그래도 맛있는 음식은 포기할 수 없는 내게, 그리고 그 마음을 어떻게든 채워주려 하는 사람에게 락타아제 효소제는 선물과 같다.
서로의 선택을 못마땅해하며 식사를 마치곤 하던 둘은 이제 서로의 선택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찾는다. 토마토소스 파스타에 치즈를 올리고, 크림소스 파스타에 고추를 넣고, 한 알의 알약을 먹는 방법으로. 다른 둘은 그렇게 함께 하기 위한 조화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것이 둘을 위한 새로운 보통이 된다. 새로운 최고가 된다.
앞으로도 우리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고, 새로운 보통을 만들어가겠지. 그 세상에서 오래 지내고 싶다. 그 세상에서 오래 쉬고 싶다.